[책마을] 안토니아, 지휘봉을 들고 편견과 싸우다
만국 공용어라는 클래식에도 장벽은 있다. 공고하게 구축된 ‘금녀(禁女)의 벽’이다. 클래식 전문지 ‘그라모폰’이 2008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오케스트라 20곳을 선정했을 때 여성이 상임지휘자를 맡은 곳은 없었다. 2017년 그라모폰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자 50명을 소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성 지휘자는 전무했다.

《지휘자 안토니아》는 여성 최초로 뉴욕 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지휘했던 안토니아 브리코(1902~1989)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이다. 네덜란드 영화감독 마리아 페이터르스가 13년 동안 자료를 모아 썼다. 안토니아의 일생을 담은 영화 ‘더 컨덕터’(2018년)의 원작이다.

안토니아는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를 여럿 달고 다녔다. 여학생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버클리 음악대학에서 지휘를 전공했다. 1930년에는 독일 베를린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여성 최초 객원지휘자로 임명됐다. 이후에도 샌프란시스코심포니, 함부르크필하모닉, 헬싱키심포니 등을 지휘했다.

일생을 클래식에 바쳤지만 안토니아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객원 지휘를 통해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그를 수장으로 앉히려는 악단은 없었다. 1941년 미국 콜로라도의 덴버심포니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최종 후보자로 선정됐지만 여성이란 이유로 기용되지 않았다. 그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전문적인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맡은 적이 없다. 1947년 아마추어로 이뤄진 덴버비즈니스맨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를 맡은 게 전부다.

책에는 안토니아에게 연인이 “결혼하고 애 낳아서 잘 키워, 사모님처럼”이라고 면박을 주거나, 음대 교수가 “여자가 지휘봉을 들고 과장된 몸짓을 한다고? 꼴불견이야”라며 성추행을 시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예술계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추행을 폭로하는 ‘미투’ 운동이 촉발된 게 불과 4년 전이다.

안토니아가 뿌린 씨앗은 오늘날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그의 고국인 네덜란드 라디오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2018년 여성 지휘자 카리나 카넬라키스를 상임지휘자로 임명했다.

한국인 지휘자 장한나(노르웨이 트론헤임오케스트라), 김은선(미국 샌프란시스코오페라) 등은 음악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후배들이 도전하도록 길을 터주고 떠난 안토니아는 1989년 숨을 거두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너의 길을 벗어나지 마라.”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