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양반가의 돌잔치 모습.  푸른역사 제공
조선시대 양반가의 돌잔치 모습. 푸른역사 제공
16세기 프랑스의 한적한 농촌 마을. 8년 전 홀연히 가족을 버리고 떠났던 마르탱 게르가 불쑥 돌아왔다. 귀향한 마르탱은 예전의 무뚝뚝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사람들은 닮은 듯하면서도 무언가 다른 그가 진짜 마르탱이 맞는지 반신반의한다. 아내 베르트랑드가 자신의 남편이 맞다고 단언하면서 논란이 종식되려는 순간, 전쟁터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진짜 마르탱이 등장한다.

주인공 이름이 영어식으로 표기된 1990년대 프랑스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의 한 장면이다. 영화는 역사학자 나탈리 데이비스가 근세 초 프랑스 농촌사회를 복원한 저작 《마르탱 게르의 귀향》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마르탱 게르와 동시대인 16세기 조선에 갑작스러운 가장의 가출과 귀환, 가짜 남편을 진짜라고 주장하는 부인 등 ‘마르탱 게르의 귀향’과 판박이인 사건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그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가짜 남편 만들기》는 조선 중기의 대구 사족 유유(柳游)의 갑작스러운 가출과 방황, 가짜 유유의 등장과 도주, 재산을 노린 살인사건으로의 비화와 그에 뒤따른 잔혹한 사형 처벌 등 일련의 사건을 되짚고 복원한 책이다. 이항복이 쓴 《유연전(柳淵傳)》을 비롯한 조선 중기의 각종 문집과 《조선왕조실록》 등에 파편으로 남은 기록을 꿰맞춰 약 500년 만에 삼류 드라마와 같은 치정극의 전말을 밝힌다.

[책마을] '욕망의 속살' 드러낸 조선판 막장드라마
1558년 어느 날 선비 유유가 종적을 감춘다. 가족들은 그가 정신이상이라고만 밝힐 뿐 가출의 이유를 드러내길 꺼린다. 그가 집을 나간 진짜 이유는 바로 ‘업박(業薄·어쩔 수 없는 운명)’. 유유는 성불구자, 혹은 과도한 여성적 특성을 지닌 탓에 아이를 갖는 게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신체적 비밀이 알려질 것을 두려워한 그는 가문의 불명예를 피하고자 고향을 떴다.

4년 뒤인 1562년. 무당 출신인 채응규라는 자가 갑자기 유유를 사칭하며 나타났다. 그는 유유의 가족관계를 훤히 꿰고 있었을 뿐 아니라 유유 본인이 아니면 알 수 없을 내용도 줄줄 읊었다. 외모가 달라진 것은 오랜 기간 평안도와 황해도를 유랑하며 고생한 탓이라고 둘러대면서….

사람들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뻔했던 순간, 유유의 동생 유연이 그가 가짜임을 눈치챘다. 하지만 대범한 사기극으로 끝날 뻔했던 일은 유유의 부인 백씨가 그가 ‘진짜 유유’가 맞다고 주장하면서 꼬인다. 채응규도 백씨와의 첫날밤에 백씨가 생리(月事)를 했으며 백씨의 넓적다리 깊은 곳에 콩알만 한 점이 있다는 은밀한 증거를 내밀며 ‘진짜’임을 강변한다.

유유의 진위를 놓고 논란이 커지던 도중 채응규가 도주해 자취를 감추면서 ‘가짜 유유’ 사건은 해프닝으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런데 이번엔 유연이 형의 재산을 노리고 유유(채응규)를 살해했다고 백씨가 신고하면서 사건은 ‘전국구 스캔들’로 비화한다. 순식간에 형을 죽인 파렴치범으로 몰린 유연은 1564년 능지처참의 극형에 처해진다.

이처럼 백씨가 극단적인 모함을 마다하지 않으며 가문에 참화를 몰고 온 것은 백씨 역시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과부였던 백씨로선 재산을 지키고, 후사를 지명할 권리를 갖기 위해선 채응규를 진짜 유유로 둔갑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채응규가 가짜임이 들통나고, 그와의 통정 및 공모 혐의가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시숙을 남편의 살해범으로 몬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리되는 듯했던 사건은 15년 뒤(1579년) 진짜 유유가 나타나면서 또다시 반전되는데….

한문학자인 저자는 대중적 흥미를 자극하거나 백씨라는 ‘팜 파탈’을 단죄하기 위해 500년 전 에피소드를 되살린 게 아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기록이 대놓고 말하지 않는 인간의 욕망이다. 무당 출신 사기꾼의 신분 상승욕, 청상과부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사투와 언뜻언뜻 내비치는 성욕, 가부장제의 모순을 감추려는 사족 남성 집단의 은폐 시도 같은 날것의 감정 말이다. 인간 내면의 목소리는 꾹꾹 누른다고 묻어버릴 수 없었다. 그 외침이 너무나 강렬하고 절실했기에.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