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연합뉴스에 지난 17일 타계한 이정식 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를 추모하는 글을 보내왔습니다.

글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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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한 시대가 저문다는 쓸쓸한 느낌"…이정식 박사 서거
한국 현대사 연구의 개척자 이정식 박사가 미국에서 서거하였다.

필자는 대학원에 입학한 직후 이정식 박사가 그의 지도교수였던 로버트 스칼라피노 박사와 함께 저술한 'Communism in Korea'의 제1권을 '한국공산주의운동사'로 번역하면서 이 박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때가 1984년이니, 엊그제처럼 기억이 생생하지만, 일제 36년보다 더 긴 세월이 흐른 것이다.

참 엄혹한 시절이었다.

책의 앞부분과 중간 부분에 등장하는 사람들 상당수는 제국주의에 의해, 친일 세력에 의해, 우익 세력에 의해 또는 동료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해 버렸다.

이 박사는 당신이 처음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연구를 시작하던 1950년대 후반은 러시아 사람이라고 음악감상실에서 차이콥스키 작품도 잘 틀어주지 않던 시절이라고 고개를 저었었다.

필자가 이 책을 번역하던 1980년대도 상황이 그다지 좋아지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보수사상가 막스 웨버는 종종 공산주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와 동일시되었고, 북한의 김일성은 여전히 '전설적 명장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가로챈 가짜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정식·스칼라피노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는 그런 시절 북한의 김일성이 1930년대 후반 항일의 영웅으로 이름을 떨친 바로 그 김일성이라고 밝힌 책이었다.

이 박사는 일제 간도 총영사관이 남긴 방대한 기록을 한 장 한 장 다 읽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한국의 반공 선전가들이 떠들어대는 '전설적 명장 김일성 장군'에 대한 서술은 없었다고 단언했다.

이 책은 미국에서는 전통주의 또는 전체주의 시각에서 쓰인 반공 서적의 계보에 들어있지만, 한국에서는 매우 불온한 책으로 취급받았다.

단지 이 책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간 사람이 김일성이 세상을 뜬 1994년까지 있었다.

1986∼1987년 세 권으로 나왔던 '한국공산주의운동사'를 2015년 한 권으로 묶어 다시 출판하면서, 필자는 이 박사를 모시고 그의 일생을 정리하는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박사가 '심문조서'라고 불렀던 이 인터뷰를 하면서 필자는 선생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거나 미처 몰랐던 사실들을 많이 깨우치며 더욱 깊은 존경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

필자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일찍이 미국에서 젊은 나이에 학문적 업적을 쌓은 이 박사를 매우 유복한 환경에서 순탄하게 공부한 분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이 박사는 해방과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 만주에서 아버지가 실종된 후 소년 가장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으며, 공산 치하의 평양으로 나와서는 3년 가까이 쌀장사를 하다가 1950년 12월 국군과 함께 아무 연고 없는 서울로 내려왔다.

만 스무 살도 안 된 이정식 박사는 멋모르고 방위군 사관학교에 입교하여 갖은 고생을 다 한 뒤 중공군 포로 심문을 위한 통역요원으로 취직했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해 영어라고는 "I am a boy, you are a girl" 정도밖에 못 한 청년이 어떻게 아이비리그의 석학이 될 수 있었을까.

그 기막힌 사연을 이 박사는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이라고 표현했다.

버클리대학에서 뒷날 '한국공산주의운동사'의 공저자가 된 스칼라피노 박사를 지도교수로 모시게 된 것이나, 때마침 한국 독립운동과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수록하고 있는 일제 관헌 자료가 마이크로필름으로 나온 것은 학문의 길에 들어선 젊은 이정식에게 큰 행운이었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자료를 처음 읽는 것, 그것은 지도도 없고 길도 없는 황무지를 걷는 것 같은 힘든 일이었지만 그야말로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은 금광을 캐는 희열이기도 했다.

그 속에서 그는 너무도 많은 '미친 사람들'을 만났다.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불가능해 보이는 조선 독립을 위해, 평등한 세상을 위해 싸우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사람들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는 그 스스로 미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선생님께서는 "책에 나오는 사람들도 미친 사람, 그 얘기를 쓰려고 한 사람도 미친 사람, 그리고 그걸 번역한 자네도 미친 사람"이라고 하신 적이 있다.

선생님께서 필자를 과분하게도 '미친놈' 반열에 올려주신 것은 그때 필자가 선생님이 인용하신 각주를 영문에서 번역하지 않고 원자료 하나하나를 확인해서 번역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낸 길을 따라가며 자료를 확인했었던 작업은 내게도 엄청난 공부가 되었다.

이 무렵 필자는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연구와 저술에 큰 결정적인 도움을 준 김남식 선생과 함께 1986년 해방 직후의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기관지와 각종 좌익 서적들을 모아 '한국현대사 자료총서' 15권을 펴내려 했다.

전두환 정권하에서 이런 작업은 매우 위험한 일일 수 있었다.

이때 우리는 이정식 선생님께 방패막이가 되어달라고 부탁했고, 선생님은 기꺼이 우리의 청을 들어주셨다.

이정식ㆍ김남식ㆍ한홍구 세 사람의 이름으로 나온 '한국현대사 자료총서' 15권은 덕분에 아무 탈이 없었고, 자료 부족에 허덕여 온 해방 전후사 연구가 활성화되는 한 계기를 이루었다.

한국 현대사를 보면 이 박사의 시각은 보수적이고, 필자는 진보적인 시각을 갖고 있지만, 필자가 그를 존경하는 이유는 학문적 엄밀성과 업적 이외에도 그분의 작업에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비참하게 생애를 마친 민족의 선각자들을 애도하는 민족애와 시적인 정취"(그의 저서를 일본에서 번역한 가마타 미쓰토<鎌田光登>의 말)가 넘치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가슴이 먹먹한 것은 스승처럼 모셨던 선학이 가셨다는 것만이 아니고, 한 시대가 저문다는 쓸쓸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기록하고자 했던 '미친 사람들'의 시대는 이미 갔고, 선생님처럼 역사의 격랑에 쓸려 가버린 그 사람들을 되살리고자 했던 미친 사람들의 시대마저 저물어 가는 것이다.

얼마나 미쳤었으면 '한국공산주의운동사'가 출판되어 집에 배달되었을 때는 너무 지겨워 쳐다보지도 않으셨다고 하실까.

"사실 따위는 중요치 않아"라며 온갖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이다 보니 선생님의 빈 자리가 더 휑하게 여겨질 뿐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