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 가즈히코 교수가 8월초 도쿄 미나토구 시로카네다이의 사무실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오타 가즈히코 교수가 8월초 도쿄 미나토구 시로카네다이의 사무실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일본의 버블(거품)경제가 극에 달했던 1980년대 후반 우연히 쓰키시마를 방문한 화장품 대기업 시세이도의 디자이너는 눈을 의심했다. 그가 일하는 긴자와 쓰키시마는 조그만 운하를 경계로 마주보는 이웃 동네. 그런데도 당시 세계의 유행을 선도하던 긴자와 달리 쓰키시마는 전후 일본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히라야(에도시대의 연립주택)가 늘어선 좁은 골목에서 팬티 한 장만 걸친 아이들이 주먹야구를 하는 늦은 오후. 그 거리의 풍경에 딱 어울리는 낡은 이자카야가 눈에 들어왔다.

저녁시간은 늘상 아오야마나 아카사카 같은 화려한 거리의 고급 레스토랑과 바에서 보내던 그는 반쯤 비웃는 맘으로 이자카야의 낡은 포렴을 걷어젖히고 가게에 들어섰다. 그의 인생과 일본 이자카야 산업을 바꿔놓는 순간이었다. '일본 이자카야의 대부' 오타 가즈히코와 쓰키시마의 노포 기시다야의 첫 만남이다.
1990년경 쓰키시마(왼쪽)와 긴자. 두 지역은 2㎞ 떨어져 있다. (자료 : 일본 블로그)
1990년경 쓰키시마(왼쪽)와 긴자. 두 지역은 2㎞ 떨어져 있다. (자료 : 일본 블로그)
오타 가즈히코는 30년 넘게 직접 발굴한 일본 전역의 이자카야를 소개해 왔다. 본업은 그래픽 디자이너로 도후쿠예술공과대학 교수를 역임했지만 이자카야 전문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자카야에 관련한 저서만 20권을 넘고, 1999년 '전국 이자카야 기행'을 시작으로 22년째 이자카야 맛집을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케이블TV에서 '일본 이자카야 톱 100'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돼 한국에서의 인지도가 높다.

그가 이자카야 순례에 나선 30년전 일본에서 이자카야는 '케케묵은 아재들의 집합소' 취급을 받으며 젊은층과 여성들로부터 멀어져 가던 때였다. 우리나라의 대폿집이 거의 사라진 것처럼 이자카야도 흘러간 대중문화의 하나로 기록될 처지였다. 오타 교수의 저서와 방송은 이자카야에 대한 젊은 층과 여성들의 관심을 돌려놨다. 그가 이자카야를 일본 대중문화의 간판으로 부활시킨 인물로 평가받는 이유다.

스스로 "30년 이자카야 순례의 원점"이라고 말하는 기시다야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이자카야가 됐다. 45분간 입장 제한시간을 두는데도 개점 전부터 가게를 빙 둘러 줄을 선다.

이자카야 붐이 다시 불면서 지금은 방송과 출판업계에서도 이자카야 특집이 가장 잘 팔리는 아이템으로 대접받는다. 이자카야 전문가와 이자카야를 소개하는 방송이 범람하지만 일본 애주가들 사이에서 "오타 선생이 인정한 가게라면 진짜"로 통한다.

일본 최대 식당 검색 사이트 타베로그에도 이자카야를 검색하면 '오타 가즈히코가 이 지역 제일로 인정한 이자카야'라는 소개가 뜬다. 그가 직접 라벨을 디자인한 사케가 지금도 히로시마 등 일본 곳곳에서 판매되고 있다.
오타 가즈히코 교수의 30년 이자카야 순례의 원점 기시다야. 현재는 코로나19 긴급사태로 휴업 중이다.(자료 : 일본 블로그)
오타 가즈히코 교수의 30년 이자카야 순례의 원점 기시다야. 현재는 코로나19 긴급사태로 휴업 중이다.(자료 : 일본 블로그)
오타 교수는 30년전 기시다야를 처음 방문했을 때의 광경을 어제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주고객은 점심 나절 일찌감치 일을 마친 막일꾼들, 대부분 혼자였다.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며 TV만 응시할 뿐이었다. 말을 할 때는 주문을 낼 때 뿐이었다.

담배불에 그을어 꼬질꼬질한 재털이하나부터 익숙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한 시간 가량 혼자서 술을 홀짝이다보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것이 시대에 뒤처진 것이 주는 마음 편안함임을 그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날부터 오타 교수의 이자카야 탐방이 시작됐다. 직장 동료들을 데려가 봐야 놀림만 당할게 뻔했기 때문에 항상 혼자 다녔다. 쓰키시마를 시작으로 노포 이자카야가 몰려있는 스미다가와(도쿄 중심가를 흐르는 강) 주변을 매일 밤 배회했다. 8월초 도쿄 미나토구 시로카네다이의 사무실에서 만난 오타 가즈히코 교수는 "낮에는 시대의 최첨단을 추구하고 밤에는 홀로 노스텔지어(향수)의 세계로 향하는 나날들이었다"고 회상했다.

시대착오적인 것의 마음 편안함을 알고부터 그의 디자인도 변했다. 새로운 것, 세련된 것만 추구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향수(노스텔지어)의 요소를 가미하기 시작했다.
오타 가즈히코 교수의 초기작 '이자카야 대전(왼쪽)'과 '일본 이자카야 방랑기'. 도쿄=정영효 특파원
오타 가즈히코 교수의 초기작 '이자카야 대전(왼쪽)'과 '일본 이자카야 방랑기'. 도쿄=정영효 특파원
오타 교수의 이자카야 순례는 곧 이자카야 연구회로 발전했다. 애주가들끼리 정해진 날 정해진 이자카야에서 만나 술을 마시는 모임이었다. '연구회'라는 이름을 내건 만큼 그날 찾은 이자카야가 주는 마음 편안함이 어디서 오는지를 탐구했고, 그 결과를 신문 형태로 발간했다.

연구회 멤버였던 잡지사 기자가 이 신문을'이자카야 연구'라는 제목으로 잡지에 연재했다. 1990년 연재물을 모아 '이자카야 대전'이라는 첫번째 책을 냈다. 이 책이 아주 잘 팔렸다.

또다른 잡지사에서 이자카야 순례를 써달라는 의뢰가 왔다. 일본 최북단인 홋카이도 레분토 섬부터 남단 오키나와의 낙도까지 그가 직접 발굴한 전국의 이자카야를 소개했다. 1년 예정이었던 연재 기간이 3년으로 늘면서 3권의 책이 됐다. 그의 대표작인 '일본 이자카야 방랑기'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