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 1503~1506, 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 1503~1506, 루브르 박물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사랑받는 그림. 아마 이 작품이 많은 분들의 머릿속을 스칠 것 같습니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마주할 수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모나리자'입니다.

그림 속 인물의 미소 역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미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화가이자 미술사학자였던 조르조 바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도 기분 좋은 미소가 그려져 있어, 인간의 미소가 아닌 신의 미소 같다."

이 신비롭고 경이로운 미소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는데요. 웃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시선을 조금만 달리해보면 무표정해 보이기도 합니다. 어떨 땐 슬퍼 보이기까지 하죠. 감상자의 시선과 기분에 따라 미소가 달라 보일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합니다.

다빈치와 모나리자의 명성과 위엄은 그의 사후 500여 년이 지나도록 이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다빈치는 '21세기형 인재'를 얘기할 때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술과 과학 등 다양하고 이질적인 장르를 연결하고 융합할 줄 알았던 창의적인 인재. 다빈치만큼 여기에 딱 맞는 인물은 여전히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등 많은 글로벌 기업인들도 다빈치를 흠모했습니다. 빌 게이츠는 3000만 달러에 다빈치가 1506~1510년에 작성했던 72페이지 짜리 노트를 낙찰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생각을 통째로 알고 배우고 싶었던 것이죠.

21세기, 아니 영원히 천재의 표상으로 남을 다빈치. 그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해 살펴볼까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다빈치가 화가가 된 건 출생의 제약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공증인이었던 아버지와 농민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풍족하게 지낼 순 있었지만, 대학에 갈 수도 전문적인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죠.

아버지는 그런 그를 친구이자 화가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에게 맡겼습니다. 베로키오의 공방엔 다빈치뿐 아니라 많은 제자들이 거쳐갔는데요.

산드로 보티첼리,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등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 다수가 그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다빈치는 비록 직업을 마음대로 선택할 순 없었지만,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행운을 거머쥐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빈치 하면 완벽한 천재성을 떠올리는데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는 고등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당시 지식인들의 기본 소양이었던 라틴어를 읽는 데 서툴렀으며, 나눗셈도 잘 하지 못했죠. 손이 느려서 회반죽 벽이 마르기 전에 재빨리 그림을 그려야 하는 프레스코 벽화는 그리지 못했습니다.

그림 의뢰를 맡고도 미완성으로 남겨둔 경우가 많아서 의뢰인들로부터 많은 원망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가 평생 완성한 작품은 스무 점도 채 되지 않죠. 다빈치라는 인물이 왠지 인간적이고 친근하게 느껴지네요.

그렇다면 다빈치가 영원히 기억될 천재가 된 비결은 무엇일까요. 남달랐던 호기심, 집요하리만큼 뜨거웠던 열정 덕분이었습니다.

다빈치는 23살 때부터 40여 년간 빼곡하게 자신의 생각을 노트에 적었는데요. 이걸 보면 평소 수많은 질문과 지시를 스스로에게 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용도 정말 다양한데요. '하늘은 왜 푸른가'부터 시작해 '물이 공기보다 밀도가 높고 무거운데, 어째서 공기 중의 새는 물속의 물고기보다 더 민첩하지 않고 그 반대인가' 하는 질문까지 했죠.

자신에게 내린 지시사항도 독특하고 창의적입니다. '딱따구리의 혀를 묘사하기' '돼지 허파에 바람을 넣어 너비만 부풀어 오르는지, 너비와 길이가 함께 부풀어 오르는지 관찰하기' 등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질문과 숙제를 스스로에게 던지며, 그 답을 찾기 위해 끝까지 파고들었던 열의. 그는 이 열의 덕분에 천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요.

물론 그는 재주도 특출났습니다. 하늘을 나는 기계, 탱크 등을 설계했으며 의사들보다 더 정교하게 적은 해부 기록도 잔뜩 남겼습니다.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1490, 아카데미아 미술관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1490, 아카데미아 미술관
다빈치는 자신의 수많은 재능 중 그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그는 30살 무렵 밀라노 통치자에게 자신을 고용해 달라고 부탁하며, 편지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빼곡하게 열거했는데요. 대포, 장갑차, 공공건물 설계부터 의사, 수의사 역할까지 모두 할 수 있다고 했죠.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야 이렇게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그림도 마찬가지로, 저는 뭐든 다 그릴 수 있습니다." 그에게 그림 그리기는 '덧붙여' 말할 정도의 작은 재능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그의 명작들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성 안나와 성 모자' 등 그의 작품들엔 다빈치만의 확고한 철학과 다양한 기법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모나리자'를 보면 인물이 풍경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데요. 다빈치 이전엔 거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는 과감하고 파격적인 시도를 통해 인물을 최대한 부각시켰습니다.

'스푸마토' 기법도 접목했습니다. 스푸마토는 정교하고 섬세한 붓놀림으로, 옅은 안개가 덮인 듯 윤곽선을 흐릿하게 처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도 다빈치만의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윤곽을 진하게 그리면 인물과 배경이 단절되는 느낌을 주게 되는데요. 이를 흐릿하게 표현함으로써 인물과 배경이 최대한 연결되고 조화롭게 보이도록 한 것이죠.

모나리자의 미소에도 다빈치의 엄청난 노력이 담겨 있습니다. 그가 남긴 해부도엔 얼굴의 전체 움직임은 물론 입 근육에 대한 세부적인 연구가 담겨 있습니다.

입을 오므리게 하는 근육, 입술을 쫙 펴게 하는 근육, 원래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근육 등을 연구하고 그린 것이죠. 미소 한 번에 이토록 다양한 근육이 복잡하게 움직인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에, 실감 나면서도 여운이 남는 미소를 그릴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최후의 만찬, 1495~1497,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최후의 만찬, 1495~1497,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최후의 만찬'에도 그의 놀라운 통찰력이 담겨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정중앙에 있는 예수에 시선이 더욱 집중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빛이 예수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죠. 다빈치는 이를 위해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각도, 양 등을 치밀하게 계산했습니다.

이 작품은 제자들이 예수에게 누가 배신자인지를 묻는 순간을 극적으로 표현했죠. 당시 화가들은 작품에 상징물을 그려 넣어 내용을 암시하는 기법을 사용했지만, 다빈치는 달랐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인물들의 동작과 반응만으로 이를 드러냈습니다.

아쉽게도 이 작품은 많이 손상됐는데요. 하지만 예술적 감성과 과학 지식이 절묘하게 결합돼 있는 만큼, 현재까지도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과 관련된 재밌는 일화도 있습니다. 다빈치가 이 작품을 그릴 때 사람들은 그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습니다. 구상에만 한참이 걸렸을 뿐 아니라, 그는 한 시간 넘게 그림을 가만히 쳐다보다 붓질 한두 번만 하고 자리를 떠나곤 했기 때문이죠.

다빈치는 그림이 완성되지 못할 것을 우려한 의뢰인이 자신을 호출하자, 당당히 말했습니다. "대단한 천재성을 지닌 사람은 때론 가장 적게 일할 때 가장 많은 것을 성취한다. 아이디어와 구상을 완벽하게 실행하는 방식에 대해 골똘히 고민한 다음에야 형태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으로 채우기만 하기보다, 가끔은 비워낼 때 더욱 멋진 아이디어와 결과물을 낼 수 있음을 잘 보여주네요.

“우리는 이따금씩 자연이 하늘의 기운을 퍼붓듯, 한 사람에게 엄청난 재능이 내리는 것을 본다. 그런 사람은 하는 일조차 신성해서 뭇사람들이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으니 오직 홀로 밝게 드러난다. 다빈치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바사리의 이 말은 다빈치에 대한 최고의 찬사이자, 가장 적합한 평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때론 인간적인,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뜨겁게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담고 싶어 했던 다빈치. 그의 빛나는 열정과 재능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