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가격표' 번역 출간

미국에서 발생한 최악의 사건 '9·11 테러'로 약 3천 명이 사망했다.

이들에게는 모두 '가격표'가 붙었는데, 금액은 25만 달러에서 700만 달러까지 차이가 매우 컸다.

당시 미국 법무부가 임명한 보상 기금의 특별 단장 케네스 파인버그는 비경제적 가치와 피부양자 가치, 경제적 가치를 합산해 사망자별로 보상금을 결정했다.

비경제적 가치는 모두 25만 달러로 같았지만, 피부양자가 1명 늘어날 때마다 10만 달러가 추가됐다.

경제적 가치는 사망자의 평생 기대소득, 각종 수당, 기타 혜택 등을 계산한 뒤 사망자의 실효세율에 맞춰 조정해 얻은 값으로 천차만별이었다.

다만, 초고소득자 사망자의 유족들에게 엄청난 액수의 보상금이 지급되지 않도록 예상 연간 소득의 상한선을 23만1천 달러로 설정했다.

이렇게 계산된 보상금은 최고 약 30배의 차이가 나면서 각종 논란을 일으켰고, 보수와 진보 등 진영을 가리지 않고 비판했다.

이후 파인버그는 2013년 보스턴 마라톤 폭탄 사건 때도 민간 기금을 맡았는데, 소득이나 피부양자의 수와 상관없이 모든 유가족에게 같은 금액을 보상하기로 결정했다.

유엔인구기금의 주요 사업에 참여한 저명 통계학자이자 보건경제학자인 하워드 스티븐 프리드먼은 저서 '생명 가격표'(민음사 펴냄)에서 사람의 생명에 가치를 매기는 것과 관련한 쟁점을 파헤친다.

"사람 목숨의 값 매기기, 투명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책은 9·11 보상금을 비롯한 미국의 각종 사례를 들며 "인간 생명에 일상적으로 가격표가 매겨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이런 가격표는 투명하지도 않을뿐더러 공정하지도 않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불공정함이 심각한 문제인 이유는 가격표가 낮게 책정된 사람들이 사회로부터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높은 가격표가 붙은 사람들에 비해 더 큰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책은 생명 가격표가 마시는 공기부터 먹는 음식, 버는 돈에 이르기까지 삶의 거의 모든 측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소개한다.

개인의 생활은 물론 전쟁이냐 평화적 해결이냐와 같은 정치적 결정에도 작용하며 형사처벌이나 민사소송의 배상금 문제와 같은 법리적 결정에도 영향을 미친 사례를 전한다.

미국 사회의 심각한 양극화 현상으로 미뤄 짐작할 수 있듯이 이런 생명 가격표에는 젠더와 인종적, 민족적, 문화적 편견이 반영된다.

노인보다는 청년의 생명이, 가난한 이보다는 부자의 생명이, 흑인보다는 백인의 생명이, 외국인보다는 미국인의 생명이, 낯선 이보다는 가족의 생명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생명의 가치가 불공정하게 매겨질 때마다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렇게 책을 맺는다.

"어떤 경우에도 억만장자 한 사람의 죽음이 평범한 사람 100명의 죽음보다 가치가 높다고 판단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기업이나 정부가 고작 몇 푼을 아끼느라 사람의 생명을 불필요하게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생명 가치를 불공평하게 판단해 기본 인권을 부정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
연아람 옮김. 328쪽. 1만8천500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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