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응팔 OST를 클래식으로?…'한드 덕후' 외국인이 그 어려운 걸 해냅니다
“도이치그라모폰(DG)이 곧 클래식의 역사다.”

1898년 설립된 클래식 레이블 도이치그라모폰 홈페이지 소개 글에 나오는 문장이다. 과장처럼 보이지만 DG를 통해 음반을 낸 음악가를 살펴보면 이해가 간다. 전설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세계 최고 악단인 베를린필하모닉을 이끌고 DG에서 330여 종의 음반을 냈다. 카라얀의 라이벌 레너드 번스타인도 DG를 통해 앨범을 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유자왕 등 젊은 거장도 DG와 전속 계약을 맺고 있다.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DG가 9일 독특한 음반을 낸다. 한국 인기 드라마 OST를 클래식 버전으로 편곡한 ‘셰이즈 오브 러브(Shades of Love)’다.

도이치그라모폰이 9일 발매하는 음반 ‘셰이즈 오브 러브’.
도이치그라모폰이 9일 발매하는 음반 ‘셰이즈 오브 러브’.
음반은 표지부터 특이하다. 회색빛 배경에 손 하나만 그려져 있다. 손은 엄지와 검지를 교차했다. ‘코리안 하트’라고 불리는 손가락 하트다. 음반에는 ‘태양의 후예’ ‘사랑의 불시착’ ‘응답하라1988’ ‘도깨비’ 등 인기 드라마의 OST가 담겨 있다. 정통 클래식만 다뤄온 DG로선 이례적이다.

음반 제작을 주도한 사람은 스위스 플루티스트 필립 윤트(43·사진). 2008년 독일 바이마르음대 한국지부 교수로 발령받은 후 13년째 한국과 인연을 맺어온 ‘친한파’ 연주자다. ‘전필립’이란 별명이 생겼을 정도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다지만 어떻게 DG를 통해 음반을 낼 수 있었을까. 스위스에 머물고 있는 그를 화상으로 만났다.

“한국 드라마는 수준이 굉장히 높습니다. 독일 등 유럽 드라마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어요. 게다가 드라마 서사를 연결하는 음악이 탁월하죠. DG 본사에서도 제 제안을 듣고선 단번에 승낙했어요.”

그는 자신을 한국 드라마 ‘덕후’라고 소개했다. 처음 파견 교수로 한국에 왔을 때 문화를 이해하고 학생과 소통하기 위해 밤마다 드라마를 봤다고 했다. 그러다 드라마 OST에도 빠져들었다. 그는 “미각에 비유하자면 한국 드라마 OST는 이전까지 겪지 못한 새로운 맛이었다”며 “문화가 서로 달라도 정서는 비슷했다. 이 때문에 음악도 자연스레 이해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드라마 음악을 받아들인 배경엔 그의 성격도 한몫했다. 낯선 것을 개의치 않고 받아들이는 태도다. 그는 뮌헨국립음대를 졸업하고 곧장 미국 하버드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당시 그의 지도교수가 1998년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아마르티안 센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 세계적인 플루티스트 오렐 니콜레를 스승으로 모셨죠. 그는 제게 ‘플루트에만 매몰되지 말고 다양한 학문을 익혀야 한다’고 조언했어요. 통화정책과 화성학을 함께 공부하는 건 힘들었지만, 지성과 예술로 인생의 균형을 맞추게 됐어요.”

윤트가 OST 음반의 아이디어를 얻은 건 2018년.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일회성으로 한국 드라마 주제곡을 연주한 공연이 계기가 됐다. 이후 4년에 걸쳐 음반을 제작했다. 처음 2년 동안에는 드라마 OST를 섭렵했다. 그는 “편곡자와 함께 약 3000곡에 달하는 한국 드라마 OST를 들으며 선곡했다”며 “클래식 편곡에 적합한 곡 800여 곡을 추렸고, 최종적으로 15곡을 골라 음반에 넣었다”고 말했다.
첫 녹음을 위해 2019년 연습실에 모인 음악가들. 왼쪽부터 제바스티안 크나우어, 리처드 용재 오닐, 다비드 필립 헤프티, 알브레히트 마이어, 필립 윤트, 마르코 헤르텐슈타인.
첫 녹음을 위해 2019년 연습실에 모인 음악가들. 왼쪽부터 제바스티안 크나우어, 리처드 용재 오닐, 다비드 필립 헤프티, 알브레히트 마이어, 필립 윤트, 마르코 헤르텐슈타인.
녹음에 참여한 연주자 면면도 화려하다. 윤트는 작곡가 마르코 헤르텐슈타인과 함께 기획했다. 올해 그래미상을 받은 리처드 용재 오닐(비올라)을 비롯해 다니엘 호프(바이올린), 알브레히트 마이어(오보에), 제임스 골웨이(플루트) 등이 연주에 참여했다. 반주는 스위스 취리히 챔버 오케스트라가 맡았다. 연주자 선정 기준은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였다.

“이름값보다는 한국인의 정서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를 먼저 봤어요. 모두 한국 문화를 한 번씩 접했던 연주자들입니다. 마이어나 호프는 이미 한국 음악을 많이 알고 있었죠. 용재 오닐은 한국 드라마 주제곡에 대해 ‘지금 시대의 서사시’라고 평가했어요.”

정통 클래식 연주자로선 이번 음반이 자칫 부담이 될 수 있다. 진중함이 부족해 보인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어서다. 그는 클래식이 지닌 엄숙함이 되레 관객들에겐 진입장벽이 된다고 강조했다.

“클래식은 마냥 진지한 음악이 아닙니다. 드라마 OST에서도 클래식 기법을 발견할 수 있어요. 바로크 시대에 쓰였던 ‘템포 루바토(긴장감을 조성하려고 음을 길게 끄는 주법)’가 활용된 거만 봐도 알 수 있죠. 장르 구분 없이 끌리는 음악이면 분명 좋은 음악이겠죠.”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