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성공과 몰락의 비밀은 이 '변곡점'에 있다
오래된 책은 낡은 종이 더미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하다. 먼지투성이 고서를 다시 펼치는 것은 시대에 뒤처진, 하품이 절로 나는 고리타분한 잔소리를 반복해 듣는 곤욕을 각오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간의 시련’을 이겨낸 소수의 책에는 ‘고전’이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이 따라붙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고전 속에서 세상을 헤쳐갈 용기를 얻고,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 지혜를 찾는다.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는 2016년 사망한 앤드루 그로브 전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1980년대 말 경영자로서 최정점에 섰을 때 남긴 ‘기업환경 변화 대응 지침서’다. 거대 반도체 제국을 건설했던 전설적인 CEO가 문장마다 자신이 겪었던 각종 시련과 영광의 경험을 꾹꾹 눌러 담았다. 출간 이후 30년 넘게 아마존 경제·경영 분야 스테디셀러 자리를 유지했고, 빌 게이츠와 피터 드러커, 워런 버핏 같은 명사들이 앞다퉈 찬사를 보냈다. ‘오래된 경영서에선 배울 게 없다’는 경영학 분야의 뿌리 깊은 편견도 자연스럽게 무너진다.

[책마을] 성공과 몰락의 비밀은 이 '변곡점'에 있다
저자는 기업의 생사를 가르고, 유능한 경영자와 무능한 지도자를 판별하는 계기가 되는 대격변이 시작되는 ‘전략적 변곡점’을 알고 그에 대응하는 방법에 책의 대부분을 할애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위협과 모국 헝가리를 덮친 공산주의 압제를 피해 활동 무대를 미국으로 옮겼고, 이름까지 ‘안드라스 이슈트반 그로프’에서 ‘앤드루 스티븐 그로브’로 바꿨던 이력을 고려하면, 저자가 유난스럽다고 할 정도로 생존을 위한 변화에 천착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기업은 필연적으로 사업과 관련한 근본적인 것들이 변하기 시작하는 시점인 ‘전략적 변곡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일시적 현상도 아니고, 첨단산업에만 국한되는 일도 아니다. 기업의 최후를 알리는 전조가 될 수도 있고, 새로운 성장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기업들은 변곡점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제물이 되기도 한다.

전략적 변곡점의 힘은 너무나 막강하다. 철도와 자동차의 등장에 직면한 마차, 유성영화 시대를 맞이한 무성영화 배우, 새로 입점한 대형 할인마트 인근의 수많은 구멍가게가 변곡점 앞에서 스러져갔다. 아무리 큰 기업이라도 이 변화 앞에선 거친 물살에 휩쓸린 조각배 꼴이다. 수십 년간 효과를 발휘했던 사업 방식들은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된다.

혼란과 불확실성, 무질서를 동반하는 까닭에 변곡점의 물결 속에서 경영자부터 말단 직원까지 감정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도 필연적이다. 때론 바람이 태풍이 되고, 파도가 해일이 되듯이 거대한 변화가 겹쳐서 10배의 변화, 10배의 힘이라는 ‘슈퍼 파워’로 닥치기도 한다.

문제는 변곡점이 닥치는 것을 알아채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경고등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예고 없이 다가와 덮칠 뿐이다. 일시적인 흔한 변화와 새 시대를 알리는 전략적 변곡점을 구분하는 것도 지난한 일이다. 심지어 대변화의 물결에 휩쓸린 뒤에도 정체를 파악하는 게 쉽지 않다. 거대하고 중요한 무엇인가 변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가늠도 못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런 만큼 전략적 변곡점의 도래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나아갈 방향을 신속하게 바꿔야 한다. 새로운 항로로 배를 잘 몰길 바란다면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제대로 감지해야 한다. 불길한 징조를 감지했다면 촌각을 다퉈서라도 변화를 위한 몸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과는 다른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빠르게 변신해야 한다는 얘기다.

실제 대처에선 타이밍이 중요하다. 일찍 행동할수록 효과를 발휘한다. 같은 행동이라도 뒤늦게 실행하면 미흡한 결과를 얻을 뿐이다. 기존 사업의 기세가 아직 강할 때, 아직 현금 흐름이 활발할 때, 조직이 아직 온전할 때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 선제적 변신만이 충격파를 줄이고 출혈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원저는 1988년에 초판이, 1996년과 1999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한국어판도 1998년 선보였다가 오래전에 절판됐다. 오래된 연식만큼 MZ세대는 접해본 적도 없을 ‘저성능’ 반도체와 구식 OS 프로그램이 첨단 사례로 등장하고 AT&T, HP, 델처럼 이제는 ‘구식’으로 취급받는 회사들이 혁신의 모범으로 언급되는 것이 낯설다. 애플에서 쫓겨나 절치부심하던 시기의 스티브 잡스를 실패자로 묘사하는 등 시대적 한계도 뚜렷이 보인다.

하지만 내연기관의 쇠퇴와 전기차의 부상, 전통 유통 대기업의 쇠락과 온라인 거래의 우위, 유튜브와 넷플릭스 앞에서 초라해진 지상파TV처럼 전략적 변곡점의 출현이 일상화한 오늘날, 책이 전하는 메시지의 가치는 조금도 빛이 바래지 않았다. 세대를 건너뛰어 출판사와 역자를 바꿔가며 독자들에게 다시 선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일 테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