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비 씨, 연합군 심문 조서·포로 정책 문서 등 분석
광복전 태평양전선 동원된 한인 "일본군서 학대당했다"
"한인 병사들은 일본을 위해 싸우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장에 도착하자 일본인을 신뢰하는 한인 병사들의 마음은 사라져갔다.

그 이유는 가혹한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
광복 4개월 전인 1945년 4월 23일 일본군의 남서 태평양 전선에서 포로가 된 한인(조선인) 탄약병 두 명은 미군 파견대가 심문하자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과의 차별과 학대를 토로한 한인은 이들 외에도 적지 않았다.

일본 히토쓰바시대 박사 후기 과정 연구자인 김유비 씨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펴내는 학술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최신호에서 "호주 인근 남서 태평양 지역에서 연합군에 잡힌 한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일본군에 의한 차별과 학대를 이야기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논문에서 지금까지 남서 태평양 전선에 동원된 한인의 실태가 불분명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연합국 남서 태평양 지역 산하 연합군 번역·통역부(ATIS)가 생산한 포로 심문 조서와 포로 정책 문서 등을 분석한 결과를 공개했다.

그가 조사한 심문 조서는 모두 86건이다.

1942∼1945년에 작성됐으며, 대상은 군인 41명과 군속(軍屬, 군무원) 45명이다.

김씨는 "일제의 전선이 태평양 각지로 확대되면서 부족한 병력을 메우기 위해 조선에 주둔하는 군대를 전용(轉用)하거나 신설 부대를 투입했다"며 "일본군의 패퇴로 인해 고립되거나 사지에 몰린 한인들은 연합군 포로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연합군은 남서 태평양 전선에서 되도록 많은 포로를 획득해 정보를 수집하려 했다"며 "포로가 군사적 가치가 있는 지식을 가졌거나 전쟁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는 집요할 정도로 여러 번 심문했다"고 강조했다.

김씨는 한인 포로들이 심문 과정에서 진술한 "일본인 병사에게 경시되고 경멸적인 말을 들었다", "별것도 아닌 죄로 셀 수도 없이 몇 차례나 때렸다", "일본 육군의 한인들은 평등하지 않았다"는 발언을 소개했다.

또 다른 포로는 "일본인 병사는 언제나 한인 병사를 때리거나 모욕했고, 그래서 한인들은 언제나 부대를 버릴 기회를 기다렸다"고 했다.

군인이 된 동기와 관련해서는 "지원할 것을 강요당했다"라거나 "지원하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방도가 없었다.

서류상에는 한인들이 지원했다고 분류되겠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의지에 반해 징병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는 식으로 강제성이 엿보이는 증언이 있었다고 김씨는 지적했다.

아울러 군속 심문 조서에도 "한인은 오로지 산호 채취하는 일만 했다"라거나 "일본인은 한인들이 다른 섬에 가서 쉬지 못하게 했고, 일본인에게 구타당하지 않은 한인은 없다"는 내용이 있는 점으로 미뤄 일본군에서 근무한 한인들이 가혹한 환경에서 차별당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심문 조서는 한인 군인의 회고에 기반한 증언이 아닌 생생한 증언이어서 기억이 왜곡될 가능성이 작다"며 "동남아시아와 중국 전선의 한인 포로 심문 조서도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