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세쿼이아 길 따라 '수국천국'
고성에는 또 한 곳의 수국 명소가 있다. ‘만 가지 꽃과 향기로운 풀들이 있는 곳’이라는 뜻의 ‘만화방초(萬花芳草)’다. 규모는 그레이스정원이 더 크지만 수국정원을 먼저 조성한 곳은 거류면에 있는 만화방초다. 1997년 정종조 대표가 도시 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안식처를 마련해 주고자 수국을 심으면서 만든 정원이다.

메타세쿼이아 길 따라 '수국천국'
만화방초의 전체 공간은 33만578㎡인데 이 중 6만6115㎡는 야생 녹차밭이다. 야생식물도 700여 종이나 서식하고 있다. 정원에는 200종이 넘는 다양한 품종의 수국이 자라고 있다. 일부 수국정원이 수국을 더욱 화려하게 보이기 위해 인공으로 색깔을 내는 경우가 있지만 만화방초는 자연을 최대한 살리자는 정 대표의 철학을 구현했다. 포클레인 작업을 거의 하지 않고 짐승이 다니던 길을 그대로 활용했다.

만화방초는 오래 가꿔온 곳인 만큼 식생도 다양하고 공간도 다채롭다. 노랑어리연꽃이 만개한 작은 연못이 있는가 하면, 계곡 옆으로 울창한 편백나무와 수국이 어우러진 공간도 있다. 만화방초에서 수국이 가장 많이 핀 곳은 수국꽃길이다. 정원 위쪽은 벽방산으로 이어지는데 정 대표는 전망대까지 수국을 심어 그야말로 수국 천지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경남 고성 그레이스정원

메타세쿼이아 길 따라 '수국천국'
프랑스의 시인인 제라드 드 네르발은 “모든 꽃은 자연에서 피어나는 영혼”이라고 했습니다. 시인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꽃을 좋아하는 것은 자연의 영혼과 교감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꽃도 유행을 탑니다. 최근까지 가장 인기 있었던 건 유채꽃이었습니다. 가을철에는 메밀꽃이 대세이고 겨울에는 동백꽃을 찾아 여행을 떠납니다. 꽃은 아니지만 불과 3년 전만 해도 전국에 핑크 뮬리(분홍억새) 붐이 일었죠. 핑크 뮬리가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이 바로 수국입니다. 수국은 한자로 ‘물 수(水)’에 ‘국화 국(菊)’ 자를 씁니다. 이름에 걸맞게 물을 좋아하고 국화처럼 넉넉한 꽃을 피웁니다. 수국 하면 제주도를 떠올리는 분이 많은데 경남 고성에 있는 그레이스정원은 조금 덜 알려진 수국정원입니다. 정갈하게 조성된 수국정원은 이름처럼 우아합니다. 이번 주말에는 탐스럽게 핀 수국을 따라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수십만 그루의 수국이 맞는 민간정원

메타세쿼이아 길 따라 '수국천국'
고성 백암산 뒤편에 비밀의 정원이 있다. 지난해 문을 연 그레이스정원은 수국을 테마로 한 넓이 59만5000여㎡의 민간정원이다. 메타세쿼이아가 마치 군인처럼 도열한 입구부터 보랏빛 수국이 화사한 꽃송이를 자랑한다. 6월 중순은 넘어야 제대로 만개할 터인데 올해는 일찍 찾아온 더위 탓인지 벌써부터 정원 곳곳에서 수국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돌담길을 따라 올라가니 구릉과 수풀에도 각양각색의 수국이 만발하다.

그레이스정원은 경남 창원의 마금산온천에서 온천장을 운영하는 조행연 씨(76)가 14년에 걸쳐 가꿔온 정원이다. 그레이스정원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눈치챘겠지만 실상 이 정원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조씨가 선교센터를 지으려고 만든 것이다. 시작은 자신이 운영하는 온천장에 있던 메타세쿼이아를 옮겨 심는 것이었다. 길 양옆으로 정갈하게 줄지어 메타세쿼이아를 심은 뒤 숲 한가운데에 붉은 벽돌로 교회부터 지었다.

그때부터 정원과 식물에 대해 공부했다. 원예와 관련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유튜브를 뒤졌다. 하나하나 공부해가면서 정원 만들기를 진두지휘했다. 10년이 넘게 정원을 꾸미는 과정에서 조씨는 자료를 뒤지고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조언을 얻어 식물과 관련한 실전 지식을 익혔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는 지금도 매일 창원에서 인부들을 태우고 출퇴근한다.

경사진 물길따라…성스러운 수국길

메타세쿼이아 길 따라 '수국천국'
조 대표가 처음 수국을 심게 된 것은 2006년 창원의 갈멜수도원 수녀들로부터 수국 300그루를 얻으면서였다. 수녀들이 캐낸 수국을 정원에 옮겨 심었는데 이듬해부터 탐스럽게 피어나는 수국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수국이 개화 시기나 토양에 따라 전혀 다른 색깔의 꽃을 피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처음에는 흰색에 가깝다가 시간이 지나면 연한 녹색을 띠고, 이후 밝은 파란색을 거쳐 자주색이나 분홍색으로 변했다. 심지어 토양에 따라 꽃의 색이 변하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토양이 알칼리성이면 분홍색이 짙어지고 산성이면 푸른색으로 변한다. 새로운 품종의 수국을 수집해 그레이스정원을 넓혀가면서 조 대표는 삶의 기쁨을 느꼈다고 했다.

그레이스정원은 전문가들 눈에는 어딘가 허술해 보일 수도 있지만 허세나 과장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메타세쿼이아 길에 한쪽은 수국을 심고, 반대쪽에는 경사진 물길을 놓고 작은 연못을 만들어 물소리를 배치한 조경이다. 그레이스정원의 수국은 청명한 날에도 좋지만 장맛비가 그치고 꽃과 잎의 색감이 짙어질 때 더 청량하다.

정원에는 수국만 있는 건 아니다. 정원 위쪽의 경사지에는 자작나무와 해국을 심어 멋스러움을 더했다. 햇살은 더 농밀해지고 수국을 따라가는 길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고성=글·사진 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