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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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페이지, 첫 문장부터 주저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중화인민공화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발생한 코로나바이러스’라고 분명하게 명시하면서 중국의 아픈 곳을 정면으로 거론한다. 정치, 외교, 군사, 교육 등 전 영역으로 퍼진 중국의 영향력, 집요하고도 치밀했던 그 침투 과정을 분석하는 데 있어 에둘러 말하는 법도 없다. 논조는 단호하지만 조금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다. ‘사실’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턱밑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중국의 위협적인 실상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중국의 조용한 침공》은 호주의 중국 전문가가 중국 공산당이 30여 년간 조직적으로 추구해온 해외 영향력 확장 전략을 폭로한 책이다. 2018년 원저 출간 이후 호주와 미국의 대(對)중국 전략 수정에 영향을 미쳤고, 일본어 번역본은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각국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중국의 위협에 대해 “실체가 없다”고 경시하며, 마피아 보스 앞에 선 보이스카우트처럼 순진하게 대처했다가 큰 곤욕을 치른 호주 사회의 경험과 반성이 책 곳곳에 담겨 있다. ‘조용한 침공(Silent Invasion)’이라는, 마치 외계인의 침략을 다룬 SF물이나 병해충 확산 피해를 그린 다큐멘터리가 연상되는 원제도 그런 축적된 고민을 반영한다.

[책마을] '중국夢'이란 가스라이팅…처음은 돈, 그 다음엔 협박
호주가, 미국이, 그리고 한국과 세계가 맞닥뜨린 ‘중국의 폐해’는 소름 끼칠 정도로 비슷하다. 외부 세계를 향한 과민하고 편집증적인 태도, ‘협박’의 도구로 전락한 교역과 투자, 공세의 표적이 된 전력산업과 항만, 대대적인 부동산 매입, 화교와 유학생을 활용한 스파이 행위, 다문화 정책을 악용한 교육·언론 분야로의 침투, 미국과 동맹의 ‘약한 고리’에 대한 집요한 공세 등으로 야금야금 주권을 빼앗는 중국의 위협은 일관성을 띤다. ‘친중·반미’ 성향을 드러내며 “중국의 심기를 거스르면 큰 피해를 본다”고 소리 높이는 이들이 침략의 향도(嚮導) 역할을 하는 것까지 판박이다.

중국이 이처럼 다른 나라와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근원은 1989년 톈안먼 사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체제 붕괴의 위기를 겪은 중국 지도부는 강력하게 국가를 통합할 이념을 찾았다. 그래서 부상한 것이 중국의 역사는 외세의 괴롭힘에 맞선 것이라는 서사였고, 외부 세계와의 대립을 부추기는 중화 민족주의였다. 거듭된 세뇌를 받은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식민주의의 희생자로 봤고, 그들의 분노는 내부가 아니라 외부로 향했다. 국제법엔 눈 감았고 인류 보편의 가치는 ‘그릇된 서구식 사고방식’이라며 거부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전면에 내세운 ‘중국몽(中國夢)’은 왜곡된 중국인의 집단 심성을 제어할 최소한의 통제장치마저 제거했다. 인민해방군 예비역 대령인 류밍푸의 용어에서 따온 ‘중국몽’은 중국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미국을 대신해 세계 지도자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것. 자유보다는 질서, 법보다는 윤리, 민주주의·인권보다는 엘리트 통치를 앞세우는 중국식 패권 제국을 공언한 것이었다. ‘중국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구호는 복수를 꿈꾸는 보복주의, 선민의식에 기반한 인종차별주의, 만족할 줄 모르는 영토 확장주의를 가리는 분칠에 불과했다.

중국이 양손에 쥔 무기는 교역과 투자였다. 보통은 경제라는 끈을 당기면 상대방은 알아서 재빨리 움직였다. 맘에 들지 않는 나라에 “끔찍한 경제적 피해를 주겠다”고 넌지시 협박만 해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사드 보복 때처럼 불매운동을 일으키고, 관광객의 발길을 끊게 하는 것은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중국 기업들은 일선에서 공산당의 지시를 일사불란하게 실행했다.

일대일로(一帶一路)는 중국몽을 현실화하는 카드였다. 눈독을 들인 대상은 항구와 철도, 도로, 에너지망, 통신 등이었다. 중국 자오상쥐그룹은 2014년 군사기지가 인접한 호주의 석탄 수출항 뉴캐슬의 항만공사를 인수했다. 재정 위기의 혼란 속에 그리스 피레우스항은 중국의 유럽 진출 교두보가 됐다. 중국이 확보한 외국 항구만 60여 개에 달한다.

국영은행들과 중국 영향 하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은 위안화를 국제통화로 만들고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키우는 데 앞장섰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부채를 안기는 것도 즐겨 쓰는 술수였다. “중국의 또 다른 아프리카가 되길 원치 않는다”는 비명이 각지에서 터져 나온 것은 당연지사. 이제 이들 지역에 중국이 소유시설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파병하는 것도 시간문제가 됐다.

저자는 외교·경제 정책부터 남극 개발, 대학과 연구기관의 학문 연구, 첨단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정보 유출까지 사방으로 뻗친 중국의 위협을 상세하게 전한다. 그리고 그 책임을 철저하게 중국 공산당에 집중한다. 막연하게 중국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는 흔한 혐중(嫌中) 서적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따가운 외부의 시선을 알기 위해서라도 중국인들이 이 책을 접할 필요가 있지만 중국에선 금서 ‘낙인’이 찍혔고, 저자의 중국 입국은 금지됐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