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주어캄프 출판사가 간행한 헤르만 헤세 전집
독일 주어캄프 출판사가 간행한 헤르만 헤세 전집
독일의 유명 출판사인 주어캄프는 1950년 페터 주어캄프에 의해 설립됐습니다. 100~200년이 훌쩍 넘는 업력을 자랑하는 독일 출판계에선 '신생' 출판사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 초 창업자 가문 내 내분이 일어나기 전까지 독일의 문화 아이콘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창업 직후부터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와 학자, 지성인들의 책을 대거 출판하며 독일 문학·사상계의 선두주자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주어캄프는 나치 집권기와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황폐해졌던 독일인의 정신세계를 재건하는 데 앞장선 출판사입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페터 한트케,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페터 바이스와 같은 전위작가들의 실험적 작품들을 소개했고, 헤르만 헤세 같은 독일 유명작가들의 전집을 출간했습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발터 벤야민 등 당시 낯선 유대계 사상가들의 책을 앞장서 펴낸 곳도 주어캄프입니다.
왼쪽부터 지크프리트 운젤트 주어캄프 기획자, 작가 하인리히 뵐,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
왼쪽부터 지크프리트 운젤트 주어캄프 기획자, 작가 하인리히 뵐,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
첫 출발부터 화려했습니다. 창립 첫해인 1950년 주어캄프가 선보인 첫 출판물 목록에는 막스 프리슈의 '일기 1946~1949',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발터 벤야민의 '1900년경의 베를린 유년시대'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곧이어 테오도르 아도르노,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의 작품도 뒤를 이었습니다. 정말 쟁쟁한 필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출판사는 독일어권 유명 저자들을 잇달아 확보하며 입지를 굳혀 나갔습니다. 위르겐 하버마스, 니클라스 루만 같은 사상가들이 필진으로 참여했습니다. 디자이너 빌리 플렉하우스가 책의 표지 디자인을 전담하며 주어캄프 하면 떠오르는 표지 디자인을 일관되게 책임졌습니다.

다소 성급한 판단일 수도 있지만 최근 한국에서도 독일 주어캄프의 초기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중견 출판사가 있습니다. 얼마 전 창립 20주년을 맞은 휴머니스트입니다. 이 출판사는 인문, 역사, 예술, 과학 분야를 중심으로 2100여 명의 저자와 함께 1300여 종의 단행본을 선보였습니다. 길지 않은 업력을 고려할 때 대단한 성과입니다. 휴머니스트가 낸 책 중 1만 부 이상 팔린 게 300여 종으로 전체 출간 도서의 23%에 이르고, 출간한 책의 92%가 절판되지 않고 꾸준히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습니다.
휴머니스트 창사 20주년 기념 교보문고 전시회/휴머니스트 제공
휴머니스트 창사 20주년 기념 교보문고 전시회/휴머니스트 제공
출판사의 대표 필진도 화려합니다. 특히 휴머니스트가 새로 발굴한 뒤 유명 저자가 된 분이 많다는 점에서 주어캄프의 사례를 떠올리게 합니다. 진중권 이진우 주경철 이진경 남경태 정민 안대회 박시백 설혜심 등 오늘날 한국 사회의 사상과 미술, 역사와 철학, 고전을 대표하는 저자들이 즐비합니다.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와 '서양미술사', 박시백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철학자 이진우의 '니체의 인생 강의', 역사학자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등등 출판사를 대표하는 양서를 한 손에 꼽기도 쉽지 않습니다.

휴머니스트는 지식 대중화를 위해 새로운 감각과 글쓰기를 선보이는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면서 깊이와 대중성을 아우르는 책을 다수 선보이며 국내 출판계에 활기를 보태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창립 20주년을 맞아선 시대의 고전을 만들고, 새 시대마다 고전을 새로 써야 한다는 철학에 근거해 스타 필진의 주저(主著)를 다시 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3~5년마다 꾸준히 개정 작업을 반복해 시대와 호흡하는 책을 만들어낸다는 계획입니다.
휴머니스트 창사 20주년 기념 교보문고 전시회/휴머니스트 제공
휴머니스트 창사 20주년 기념 교보문고 전시회/휴머니스트 제공
출판사는 현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20주년 특설 코너를 열고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김원중의 명역고전 시리즈, 사서 특별한정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리커버 시리즈' 등 20주년 에디션을 전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의 척박한 출판 환경 속에서도 과감한 시도를 이어가는 중견 출판사가 앞으로 어떤 성과들을 선보여 나갈지 주목됩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