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돈벌기 1]
샤넬 매장에 몰린 투잡러

명품시장 역대급 호황
매장 개장 2시간 전 70~80명 긴 줄
"돈 있어도 가방이 없다" 아우성
14일 오전 서울 잠실에 있는 한 백화점 앞에서 샤넬 매장 입장을 기다리는 고객들이 긴 줄을 선 채 개장을 기다리고 있다. /안혜원 기자

14일 오전 서울 잠실에 있는 한 백화점 앞에서 샤넬 매장 입장을 기다리는 고객들이 긴 줄을 선 채 개장을 기다리고 있다. /안혜원 기자

지난 12일 오전 8시 반. 서울 잠실 롯데백화점 에비뉴엘 월드타워점. 아침부터 백화점 주변을 70~80명 가량의 기다랗게 늘어선 행렬이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낯선 광경에 깜짝 놀라는 사이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라는 타박이 들려왔습니다.

샤넬 ‘오픈런’(open run) 취재를 위해 이날 ‘줄 서기 알바’를 하는 김해나 씨(34·가명)를 만났습니다. 최근 언택트 시대를 맞아 보복소비가 상당히 늘어나면서 샤넬 등 명품 가방에 대한 구매 욕구도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 덕에 전국 각지의 샤넬 매장에선 오전시간에 매장 앞을 집중적으로 줄 서기 알바를 하는 ‘프리랜서’도 생겨났습니다. 주부나 학생 등 비교적 여유 시간이 많은 사람들이 많지만, 직장을 다니며 오픈런을 뛰는 투잡러들도 적지 않습니다.

IT회사를 다니는 해나 씨도 오픈런 투잡러입니다. 해나 씨네 회사는 출근 시간이 자유로운 편입니다. 더군다나 최근엔 재택 근무를 하게 되면서 오후 근무를 택한 해나 씨의 오전은 온전히 개인 시간이 되었습니다. 해나 씨는 최근 오픈런 알바를 하면서 시간당 1만원에서 1만2000원가량을 벌고 있습니다. 그는 “1등 자리를 맡으러 나올 경우엔 하루에 8만~9만원 가량을 번다”고 소개했습니다.

해나 씨는 줄 가장 끝으로 가 캠핑용 의자를 능숙하게 펼치더니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는 “가장 첫 번째 자리에 줄을 서려면 새벽 3~4시엔 와야한다”며 “적어도 오전 7시엔 도착해야 10번대 대기표를 받을 수 있다”고 조언했습니다. 해나 씨는 “오늘은 수요일이라 그런지 비교적 사람이 적은 편”이라며 “보통 이 시간 정도엔 100명~150명 가량은 줄을 서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전 10시 반 샤넬 매장이 문을 열자마자 줄을 섰지만 대기순서 99번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오후 3시반 가량이 되었을 때 입장할 수 있었다.

오전 10시 반 샤넬 매장이 문을 열자마자 줄을 섰지만 대기순서 99번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오후 3시반 가량이 되었을 때 입장할 수 있었다.

백화점 개장시간이 20분 정도 남았을 때 직원들이 나와 대기번호를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잠시라도 줄에서 이탈할 경우 대기번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기자는 이 때 오픈런 행렬을 대상으로 취재를 나와 대기번호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2시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됐습니다. 오전 10시 반 백화점 문이 열리면서 이젠 사람들이 샤넬 매장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습니다.

오전 10시 반 샤넬 매장 앞으로 사람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부 고객들은 넘어지거나 고성을 지르며 다투기도 했습니다. 왠지 모를 경쟁심이 들어 이들과 함께 달려가 줄을 섰을 때 앞엔 100여명의 대기 줄이 생겼습니다. 차례가 오고 샤넬 매장 앞 대기 예약을 할 수 있는 키오스크 화면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입력하자 ‘대기인원 98팀’이라는 안내문구가 나왔습니다. 직원은 “오후 3~4시는 되어야 입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 왔습니다. 그 사이 뒤로 늘어선 사람들 사이에서 “오늘 클미(클래식 미디움)는 대기 1번이 사갔대”, "오늘은 돈이 있어도 클미는 못사겠네" 등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서울 잠실 한 백화점 샤넬 매장에서 고객이 상품을 고르고 있다. 등 뒤엔 오픈런을 위해 가져온 캠핑용 의자를 매고 있다.

서울 잠실 한 백화점 샤넬 매장에서 고객이 상품을 고르고 있다. 등 뒤엔 오픈런을 위해 가져온 캠핑용 의자를 매고 있다.

864만원에 달하는 샤넬 클래식 미디움 백은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인기가 많은 백입니다. 하지만 이 비싼 백을 사고 싶어하는 수요 만큼 공급이 이뤄지진 않는 모양입니다. 샤넬 오픈런 행렬에는 매장 여러 곳을 들러 이 같은 인기 가방이나 신발, 지갑 등을 사들이는 이른바 ‘메뚜기족’도 있습니다. 구매와 동시에 프리미엄(웃돈)을 받고 물건을 파는 리셀러들입니다.

이 리셀러들은 하루에 두세개 매장을 돌며 눈에 보이는대로 인기 상품들을 사들입니다. 예컨대 압갤(압구정 갤러리아백화점)에 아침 일찍 도착해 대기번호를 걸어놓고 도보 10분 거리의 압현(압구정 현대백화점)에 들러 대기 등록을 한 다음, 또 가까운 거리의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로 가 다시 줄을 서는 식입니다. 시간이 남으면 잠실 롯백(롯데백화점 에비뉴엘 월드타워점)까지 들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2년차 리셀러 고모 씨(28)는 “가방 하나 당 50만~60만원, 지갑 하나 당은 10만~15만원의 웃돈을 받고 팔 수 있다”며 “인기가 많은 백을 ‘득템’할 경우 현금으로 프리미엄을 챙기는 것은 물론 백화점 구매 실적을 쌓아 VIP 대접도 받을 수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고 씨는 롯데백화점 상위 0.5% 수준의 우수 고객(MVG) 입니다.

이 리셀러들이 되파는 샤넬 제품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주로 거래가 이뤄지는 한 중고 거래 커뮤니티에선 현재까지 샤넬 가방 새제품만 판매한다는 글이 1200개 가량 올라와 있습니다. 이들 덕분인지 백화점들은 올 1분기 ‘초역대급’ 매출을 연일 발표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한해 7만명이 넘는 자영업자들이 빚을 내며 버티다 끝내 폐업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분위기입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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