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처럼 몰아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급 다른' 지휘 므라빈스키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의 사진이 복원됐을 때,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당시의 선명한 컬러 영상을 봤을 때 마음속에서 경이로움이 밀려왔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막연함이 구체화되고 퍼즐이 맞춰진다. 예브게니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연주도 그랬다. 거장의 음악 세계는 도이치그라모폰의 차이콥스키 교향곡집과 멜로디야, 에라토 레이블 녹음으로 익숙했지만 알투스 레이블이 선보인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실황을 처음 접했을 때, 비로소 오늘 들은 연주 같은 생생한 실감에 휩싸였다.

므라빈스키는 옛 소련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지휘자다. 19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그의 음악적 재능은 모계로부터 물려받았다. 숙모가 마린스키 오페라의 디바였다.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한 어린 므라빈스키는 차이콥스키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공연을 관람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20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소년가장이 된 므라빈스키는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를 위해 발레 학교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1924년에는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입학해 작곡과 지휘를 전공했다. 1931년 여름, 음악원 졸업 기념으로 그는 자신의 수족같이 여기게 될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을 처음으로 지휘했다.

마린스키 오페라의 부지휘자가 된 므라빈스키는 1937년 11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을 초연했다. 대성공이었던 이 공연으로 므라빈스키는 주목받게 된다. 이후 50년 동안 제왕적 마에스트로 므라빈스키의 전설적인 연주들이 이어진다. 그가 다져온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앙상블은 토스카니니보다 더 날카로울 정도로 정확한 스코어 해석과 템포 설정의 예술이다. 악보 그 자체보다 한 차원 높게 표현된다. 오케스트라의 텍스처가 흔들리지 않고 명료하다. 격렬하고 고통스런 부분도 눈도 깜짝 안 하며 통과한다. 가녀린 피아니시모에서 천둥소리와 같은 포르티시모까지 거장은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1973년 5월 26일 도쿄 분카카이칸 실황은 반세기가 돼가지만 선명하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작품을 초연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권위, 첫 일본 방문이라는 긴장감이 연주 속에 묻어난다. 앨범의 반응이 뜨거웠기에 일반 CD가 아니라 HQCD로 재발매되기도 했다. HQCD는 일반 CD와 소재에서 차이가 난다. 액정 패널용 폴리카보네이트를 재료로 사용해 특수합금을 반사막으로 썼다. 예전에 발매된 일반 CD와 비교해 보면 저역의 증대가 뚜렷하다. 잔향이 풍성하고 바이올린과 플루트 등 개별 악기의 사운드도 또렷하게 포착된다.

러시아의 음악이 궁금하다면 이 음반은 꼭 들어봐야 한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의 최상급 해석, 그리고 므라빈스키의 기록 중에서도 최고의 한 장으로 추천하고 싶다.

류태형 < 음악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