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여성들의 비참한 현실 그린 '스페인 여자의 딸'…세계가 주목한 데뷔작

'자원 부국' 베네수엘라는 오랫동안 남미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로 꼽혔다.

단위면적당 석유 매장량 세계 1위를 자랑하고 다른 천연자원도 풍부한 데다 토질과 기후도 좋아 각종 산업 발달에도 유리했다.

이를테면 일부러 못 살려고 해도 그렇게 되기 힘든 나라였다.

그런데 '남미 좌파연대 맹주'로 불렸던 우고 차베스가 1999년 집권하면서부터 비극이 시작됐다.

핵심 산업인 석유 산업체들을 국유화해 권력의 도구로 삼고 전방위적 무상 포퓰리즘과 반미 정책을 펼치자 국가 경제가 내리막길을 탔다.

차베스의 사망으로 14년간의 포퓰리즘 장기 독재가 끝났지만, 후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가 그대로 정책을 계승하면서 사실상 20년 넘게 좌파 포퓰리즘이 이어졌다.

그동안 베네수엘라는 국가 부도와 몰락을 넘어 '지옥' 같은 상태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식량과 생필품은 바닥이 났고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화폐는 휴짓조각처럼 가치가 폭락했으며, 국민 다수는 생계는커녕 최소한 기본권조차 위협받게 됐다.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음식과 생활용품 등을 구하려고 쓰레기통과 무덤을 뒤지거나, 생존을 위해 집을 버리고 인접국으로 탈출하는 모습 등은 언론에서 너무 많이 다뤄져 새롭지도 않을 정도다.

포퓰리즘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가
특히 전쟁, 기아 같은 재난 상황에서는 여성, 노인, 아동 등 약자들의 삶이 더 급격히 무너진다.

아이들과 노인이 병들어도 치료받지 못하고 다수 여성이 성매매로 생계를 이어간다는 각종 기관의 조사 결과가 끊임없이 발표돼왔다.

이런 상황을 너무나 생생하고 실감 나게 그려낸 소설 한 편이 지금 세계 각국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베네수엘라 여기자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가 쓴 장편 '스페인 여자의 딸'이다.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구유의 번역으로 최근 국내에 소개했다.

보르고의 데뷔작인데도 출간 전 원고 상태에서 세계 22개국에 판권이 팔릴 정도로 높은 관심을 받았다.

현재까지 26개 언어로 번역됐고,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각종 문학상을 받고 영미권 주요 언론에서도 호평을 얻었다.

때로는 정부 기록, 언론보도, 역사책보다 한 편의 소설이 역사의 현장을 더욱 진실하고 생생하게 그려낼 때가 있는데, 이 소설이 그렇다.

특히 소설은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지옥 같은 현실을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실감 나게 묘사한다.

배고픔과 목마름, 생명의 위협 앞에서 수치심이나 이념 같은 건 사치일 뿐임을 드러낸다.

소설보다 더 극적인 베네수엘라의 현실로 미뤄볼 때 현직 언론인이지만 르포 대신 소설이란 형식을 택해 현실의 비극을 고발한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일상은 삶보다는 전시 상황을 방불케 했다.

솜, 거즈, 약품, 더러운 침대, 뭉툭한 메스, 화장지. 먹거나 치료하거나, 그게 전부였다.

내 뒤로 줄 선 사람, 나보다 더 가진 사람은 언제나 잠재적인 적이었다.

산 사람들은 남은 음식을 차지하겠다고 물고 뜯고 싸웠다.

출구가 없던 그 도시에서, 우리는 죽을 자리를 두고 싸웠다.

"(89쪽)
"압수당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여자들과 노인들, 위협하기 쉬운 조건을 갖춘 목표물이었다.

"(291쪽)
포퓰리즘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가
무너진 경제와 행정 시스템, 세계 1위의 살인율이 보여주는 치안 환경으로 폭력이 일상이 된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 소설은 멀쩡하던 도시가 갑자기 생지옥이 된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30대 후반 여성 팔콘의 삶을 추적한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오니 팔콘의 아파트는 이른바 보안관 일당에게 점령돼 있다.

한순간 살던 집을 빼앗긴 것이다.

이들은 공포 정치를 자행하는 좌파 독재 정부에 부역하는 대가로 완장을 차고 부당한 권력과 이득을 누리는 세력이다.

"베네수엘라는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변화를 겪었다.

관으로 탑을 쌓아 밧줄로 묶은 채 운송하는 이사 트럭이 보이기 시작했고, 때로는 묶이지도 않은 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원 미상의 시신들이 비닐에 싸여 라페스테로 던져졌다.

살해당한 수백 명의 희생자가 암매장되는 곳이었다.

그것이 바로 혁명의 아버지들이 권력을 잡으려는 첫 시도였다.

동시에 내가 기억하는 사회 불안과 붕괴의 첫 정의이기도 했다.

"(54쪽)
집에서마저 쫓겨난 팔콘은 '스페인 여자의 딸'로 불리던 페랄타가 살던 옆집에 우연히 들어가는데, 그 여자는 이미 숨져 있고 책상에는 스페인 국적 여권이 놓여 있다.

팔콘은 시신을 조용히 처리하고 자신이 '스페인 여자의 딸' 페랄타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베네수엘라 탈출을 목표로 삼은 팔콘은 스페인행 항공권을 사고 출국에 필요한 서류를 위조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한다.

과연 페랄타로 위장한 팔콘은 공항까지 무사히 이동해 별 탈 없이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라탈 수 있을까?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건 페랄타의 행보를 손에 땀을 쥐며 지켜보게 된다.

작가가 소설 속에서 친정부 좌파 친위대의 본모습과 베네수엘라 사회의 모순을 지적한 문장은 저널리스트다운 날카로운 통찰이 번득인다.

"혁명의 아이들은 원하는 바를 충분히 이루었다.

그들은 선 하나를 그어 우리를 둘로 갈라놓았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떠나는 자와 남는 자. 믿을 만한 자와 의심스러운 자. 비난을 야기함으로써 그들은 이미 분열이 팽배하던 사회에 또 다른 분열을 더했다.

"(66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