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학 35인이 인간 역사와 문명 살핀 '바보의 세계'

책의 제목부터 머리를 갸웃거리게 한다.

지혜가 아닌 어리석음이 역사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란다.

정말로 세계사를 바보들이 주도했을까? 그 멍청이들은 과연 누구이고 어리석음의 정체는 또한 무엇일까?
심리학자이자 인문과학 저널리스트인 장프랑수아 마르미옹은 '멍청이', '어리석음'이라는 이색 주제어로 역사를 탐색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시공간에서 인간이 행한 멍청한 행각, 각 시대와 문화마다 어리석음을 규정하던 방식을 추적했다.

"세계사는 멍청이와 어리석음이 움직여왔다"
신간 '바보의 세계'도 그 결과물 중 하나다.

전작 '내 주위에는 왜 멍청이가 많을까'로 화제를 모은 그는 멍청이 전문 조사관답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인류적 차원에서 어리석음의 역사를 조명했다.

만나 인터뷰한 이는 고고학자, 역사학자, 심리학자, 정신과의사, 철학자, 환경공학자 등 모두 35명. 이번 책은 그들의 시각을 중심으로 바보의 세계사를 다채롭게 들려준다.

현생 인류의 삶을 가능케 한 건 신석기 혁명과 농업의 발명이었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인간의 역대급 바보짓이었다고 이들 학자는 단정한다.

중세의 내로라하는 신학자보다 점성술사의 통찰이 더 합리적이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저질러진 판단의 오류도 결국 바보짓의 소산이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책은 "어리석음과 지혜는 쌍둥이처럼 붙어 있고, 동전의 앞뒷면과 같으며, 몇 번이고 되풀이된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인류는 모순적 존재이며 역사는 그 모순적 발자취라고 하겠다.

이와 관련해 '사피엔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도 "역사는 자기가 한 일이 뭔지 모르는 멍청이들에 의해 쓰인다"고 갈파한 바 있다.

책에 따르면 농업의 '발명'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를 계기로 인간은 자발적으로 길들여졌고 나약해졌으며 수많은 질병에 노출됐다.

그럼에도 진화는 승전고를 울렸다.

지구상에 수렵채집인은 500만 명에 이르렀고, 1800년경 농부는 10억 명에 달했으며, 집약적 농업으로 인간은 머지않아 100억 명에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 대다수는 도심에 모여 있다.

이에 책은 "인간들 역시 집약적 축산으로 살아가는 소들만큼 행복할까?"라고 비꼬듯 묻는다.

역대급 멍청이 짓으로 꼽히는 신석기 시대의 도래, 즉 정주 농업의 발명은 인구 폭발과 함께 '노동', '전쟁', '지배계급'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바보짓을 불러왔다고 책은 주장한다.

그 이전의 수렵채집인은 사냥하고 낚시하며 채집하는 데 하루에 서너 시간만 사용하면 됐지만, 농업인이 되면서는 오늘날 산업 노동자처럼 온종일 일을 해야 했다.

지금의 3차 산업에 종사하는 사무직 노동자도 대부분이 이런 신세다.

책은 인류사에서 유일하게 풍요로운 사회가 수렵채집사회였다고 말한다.

전쟁과 인구증가도 상관관계가 있다.

인구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정착생활이 시작되면서 인류는 지속적으로 영토를 점유해갔고 수렵채집인의 이동생활은 점차 사라졌다.

그전까지 개방돼 있던 마을들은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고 요새, 울타리, 구덩이, 성벽에 둘러싸이며 전쟁의 상처가 깊어갔다.

세 번째 어리석은 발명인 지배계급은 신석기 시대를 통과하면서 나타나, 자그마한 전통적 나부상은 무기를 든 전사상에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런 현상이 계속돼 이른바 '족장 관할구역'이라 불리던 사회는 결국 최초의 국가로 탈바꿈했다.

크기와 무게가 측정하기 쉽고 과세하기도 편한 곡물의 단일재배는 주민 통제를 위한 지배계급의 주요 수단이었다.

결국 살아 있는 생명체, 즉 식물과 동물과 인간을 모두 복종시키면서 이른바 '호모 사피엔스'의 어리석음과 멍청이 짓은 가속화했다는 게 책의 핵심 주장이다.

이처럼 농업이라는 획기적 발명이 이뤄진 석기 시대에도, 불가사의에 가까운 피라미드를 건축해낸 고대 이집트에서도, 힌두교와 불교가 태어난 문명의 정신적 고향 인도에서도, 최초의 제국을 건설하고 다양한 사상이 쟁명한 중국에서도, 그리고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그리스와 합리적 제도를 운영한 로마에서도 어리석음은 끊임없이 모습을 바꿔가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는 지고한 종교와 군주의 논리가 지배한 중세에도, 정치·산업·문화에서 혁명적 변화를 이뤄낸 근대 이후의 인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책은 "전쟁을 부추기고, 실수를 키우고, 진실을 가로막고, 희망을 배반하고, 발밑을 황폐하게 하는 멍청이 요정, 인간은 늘 그 희생자이자 공범이었다"며 "현대에 이른 인류는 과연 이제 바보짓을 좀 피해 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박효은 옮김. 윌북. 512쪽. 2만2천원.
"세계사는 멍청이와 어리석음이 움직여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