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문화예술품 기증 풍토에 변화 기대…세제 혜택·물납제 도입 주목
삼성家 통 큰 기부, 예술품 기증 활성화 계기 될까

삼성그룹 일가의 '이건희 컬렉션' 2만3천여 점 기증은 한국 문화예술사에 한 획을 긋는 일대 '사건'으로 평가된다.

단숨에 주요 박물관과 미술관 소장품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릴 만한 규모의 이번 기증이 척박한 우리 사회 문화예술 기증 풍토를 바꿀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 기증품 비율 낮고 소장품 구입예산 부족
'이건희 컬렉션' 이전에도 기증자들이 귀한 소장품을 기꺼이 내놓아 국민들이 값진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 기증자들의 선의에 기댈 뿐, 기증 문화가 폭넓게 자리를 잡지는 못했다.

지난달 말 기준 국립중앙박물관 전체 등록품 41만3천4점 중 기증품은 2만8천657점으로 약 6.9%를 차지했다.

최근 5년간 기증받은 작품은 500점도 안 된다.

지난해에는 단 7점에 불과하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국보 제180호)는 손창근 씨가 기증한 작품이다.

손 씨는 '세한도'를 비롯해 지금까지 총 305점을 기증했다.

이밖에 백자상감연당초문대접(국보 제175호) 등 4천941점을 기증한 문화재 수집가 이홍근 씨, 대보적경(국보 제246호)을 비롯한 국보 5점과 보물 21점 등 102점을 기증한 '성문종합영어' 저자 송성문 씨, 백자청화초화문표형병(보물 1058호)을 포함한 362점을 기증한 박병래 성모병원 초대 원장 등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지난해 연말 기준 전체 소장품 8천782점 중 기증 작품은 3천967점이다.

기증품 비중이 45.2% 수준이다.

2013년 11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개관하면서 2014년과 2015년에 각각 237점, 261점이 기증됐다.

그러나 이후 5년 동안 기증된 작품 수는 총 300여 점에 불과하다.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기증 작품도 5점 있다.

1972년 기증된 김환기 '론도'와 고희동의 '자화상', 1975년 기증된 이영일의 '시골소녀', 1977년 기증된 이상범의 '초동', 1985년 기증된 오지호의 '남향집' 등이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과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 세계 유명 박물관·미술관의 기증품 비율은 8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기증도 활발하지 않은데다 예산도 적어 대작 확보가 어려웠다.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올해 소장품 구입 예산은 각각 48억 원, 39억7천만 원이다.

지난 2019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김환기의 대표작 '우주'는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인 약 132억 원에 낙찰됐다.

이 작품을 구매하려면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구입 예산 3년 치가 필요한 셈이다.

삼성家 통 큰 기부, 예술품 기증 활성화 계기 될까

◇ 기증 활성화 위해 제도 보완 필요
삼성가의 통 큰 기부가 미술품 기증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꿔놓을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과거 일부 재벌 등이 미술품을 비자금 세탁이나 편법 증여 수단으로 악용하고 사회 환원을 외면했다는 지적도 없지 않았다.

삼성의 기증이 예술품을 국민과 나누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확산하는 기폭제가 되기를 문화계는 바라고 있다.

한 지역 시립미술관장은 "우리나라는 사회 환원과 기부문화 활성화가 잘되지 않고 기업들이 자체 사립 미술관 운영에 치우쳤던 게 사실"이라며 "앞으로 이런 기증 사례가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문화예술 분야 기관장을 지낸 한 미술사학자는 "해외 유명 기관과 비교해 우리나라 기증품 비율이 낮은 편"이라며 "국가의 작품 구매에 한계가 있으니 민간에서 더 많은 기증이 이뤄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기증 활성화를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그동안 세금 공제 등의 혜택 부족이 기증 문화 확산을 막는 이유로 꼽혀왔다.

최근 논의가 이뤄지는 상속세 물납제 도입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은 1910년대부터 비영리기관에 미술품 등을 기증하거나 기부하면 평가액에 대한 세금 공제 혜택을 줬다.

이는 뉴욕 현대미술관, 휘트니 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등이 건립되는 밑바탕이 됐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기증자에 대한 예우도 혜택도 열악하다는 지적이다.

혜택이 적을 뿐 아니라 절차도 복잡하고 까다로워 제도가 유명무실하다는 것이다.

서진수 강남대 교수는 "문화선진국을 지향한다면 우리나라도 선진국처럼 세제 혜택 등 기부를 활성화할 수 있는 제도를 체계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면서 "가치 있는 문화재와 미술품 등을 공공재가 되도록 유도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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