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의 별’윤여정 연기 인생

1966년 TV 탤런트로 첫발…데뷔작 '화녀' 대종상 신인상
'죽여주는 여자' 몬트리올 영화제 여우주연상 국제무대 첫 발
"좋아하는 사람들과 작품하겠다"…'노 개런티'도 흔쾌히
도발적이고 과감한 여성, 그러면서도 따뜻한 할머니. 한국 영화배우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거머쥔 윤여정은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미지를 모두 소화해내는 배우다. 74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파격과 욕망을 연기하고, 누군가의 아픔을 보듬는 커다란 그릇 같은 인물이 되기도 한다. “무엇이든 다르게 하는 것”을 연기의 목표로 삼았다는 그의 말처럼, 55년간 걸어온 윤여정의 ‘남다른 길’이 그를 오스카로 이끌었다.
데뷔작 ‘화녀’로 여우주연상
영화 ‘화녀’(1971)

영화 ‘화녀’(1971)

윤여정은 1966년 TBC 3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3년 후 MBC로 이적해 1971년 드라마 ‘장희빈’에서 장희빈 역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그는 영화보다 드라마에 더 많이 출연한 배우다. ‘사랑이 뭐길래’(1991~1992), ‘목욕탕집 남자들’(1995~1996), ‘거짓말’(1998) 등 대표작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스크린을 통해 더욱 다양한 캐릭터를 선보이며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의 영화 출연작은 모두 33편. 데뷔작부터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고(故)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에서 윤여정은 양계장집 가정부로 일하다 주인집 남자를 유혹하는 명자 역을 맡았다. 신인인데도 아이를 낙태한 뒤 쥐약으로 주인집 가족에 복수하려는 앙칼지고 섬뜩한 연기까지 매끄럽게 소화했다. ‘천재 여배우의 탄생’이라는 극찬을 받은 그는 데뷔작으로 대종상영화제 신인상과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함께 거머쥐었다.

윤여정은 26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뒤 “저의 첫 감독님이셨던 김기영 감독에게 감사드린다”며 그를 떠올렸다. 윤여정은 화녀에 이어 김 감독의 연작 ‘충녀’(1972)에도 출연하며 성공 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1975년 가수 조영남과 결혼해 미국으로 떠나면서 긴 공백기를 가졌다.
“감독의 새로운 실험 동력”
윤여정만의 독보적인 필모그래피는 결혼 13년 만에 이혼하고 스크린으로 돌아오면서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임상수, 이재용, 홍상수 감독 등의 작품에 잇달아 출연했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작가주의 성향이 강한 영화에 주로 출연하고 파격적인 캐릭터를 선보여왔다”고 설명했다.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2003)에선 성불구자가 된 남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캐릭터를, 임 감독의 ‘돈의 맛’(2012)에선 재벌가의 최고 실세로 젊은 남자 비서를 유혹하는 역할을 연기했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리메이크한 임 감독의 ‘하녀’(2010)에도 출연했다.

윤여정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2016)는 그의 이름을 해외에 알린 작품이다. 이 영화로 몬트리올 판타지아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는 이 작품에서 노인들에게 성을 파는 일명 ‘박카스 할머니’ 소영을 연기했다. ‘죽여주게 잘 하는’ 여자로 통하던 소영은 사는 게 힘들어 죽여달라는 노인들의 부탁까지 받게 된다. 윤여정은 사회의 아프고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동시에 삶과 노화의 고통과 의미를 섬세하게 연기했다. 박혜은 영화평론가는 “윤여정 배우가 있기에 많은 감독들이 한 번도 시도하지 못했던 여성 캐릭터를 만든다고 한다”며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다 표현할 줄 아는 그가 흔쾌히 해줄 것으로 믿고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연기 위해 노개런티로도 출연
예능 ‘윤스테이’

예능 ‘윤스테이’

윤여정은 무심한 듯 보이지만 정겨운 할머니 연기도 자연스럽게 소화한다. 영화 ‘계춘할망’(2016)에선 손녀의 비밀을 알면서도 이를 지켜주는 할머니를,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에선 찬실에게 무심하게 대하는 것 같아도 따뜻하고 한글도 열심히 배우는 할머니를 연기했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안겨준 ‘미나리’의 독특한 할머니 캐릭터도 이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그는 연기를 위해서라면 상업 영화와 독립영화, 블록버스터급 영화와 저예산 영화 등을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미나리’의 전작인 ‘찬실이는 복도 많지’엔 노개런티로 출연했다. 그는 “60세 이후로 돈 상관없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작품을 하리라 결심했다”며 “적은 예산으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좋은 독립영화를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세상이 규정하는 나이와 역할에 갇히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연기를 추구해온 것이 오스카까지 이른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윤여정은 앞으로도 다양한 작품으로 대중과 만날 예정이다. 최근에는 애플TV플러스의 드라마 ‘파친코’를 촬영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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