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세의 노장 배우 윤여정이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한국 배우로 처음 미국 최고 권위의 영화상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번쩍 들어 올렸다.

윤여정은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주최로 25일(현지시간, 한국 시각 26일 오전 9시) 로스앤젤레스(LA)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진행된 제93회 아카데미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수상을 위해 등장한 할리우드 배우 브래드 피트는 영화 '미나리'의 제작사 플랜B의 설립자이자 배급사 A24의 대표이기도 하다.

브래드 피트의 호명으로 시상대에 오른 윤여정은 먼저 "브래드 피트, 정말 반갑다. 드디어 만나게 됐다. 저희가 영화를 찍을 때 어디 계셨나"라며 농담을 건네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 "저는 한국에서 온 윤여정이다. 유럽분들은 절 '여영', '유정'이라고 부르는데 모두 용서해드리겠다. 보통 아시아권에 살면서 오스카는 TV로 봤는데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되다니 믿을 수 없다. 제가 정신을 조금 가다듬도록 해보겠다"고 말해 좌중을 폭소케 했다.

윤여정은 "제게 표를 던져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린다. 영화 '미나리' 팀, 정말 고맙다. 우리는 모두 가족이 됐다. 정이삭 감독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설 수 없었을 것이다. 저의 캡틴이자 감독이었다"라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함께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배우들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사실 경쟁을 믿지는 않았다. 글렌 클로즈와 같은 대배우와 어떻게 경쟁하겠나. 다섯 후보들이 있지만 우리는 다 다른 역할을 해냈다. 우리 사회에서 사실 경쟁이 있을 수 없다. 그저 운이 좀 더 좋아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윤여정은 "미국분들이 한국 배우들에게 굉장한 환대를 하는 것 같다. 감사드린다. 저희 두 아들에게도 감사하다. 아들들이 일하러 나가라고 종용한다. 아이들의 잔소리 덕분에 엄마가 열심히 일했더니 이 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자신의 첫 감독인 김기영 감독에게도 인사를 전했다. 윤여정은 "김기영 감독은 제 첫 감독이었다. 여전히 살아계신다면 제 수상을 기뻐해 주셨을 것 같다. 다시 한번 모든 분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윤여정은 1980년대 한인 가족의 미국 정착기를 다룬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인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민간 딸 모니카(한예리)를 돕게 위해 한국에서 미국으로 간 할머니 '순자' 역을 연기한 윤여정은 전미 비평가위원회부터 미국배우조합 시상식(SAG Awards)까지 크고 작은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30여 개의 트로피를 받으며 여우조연상 유력 후보로 올랐다.

윤여정은 결국 오스카의 영예를 안았다. 한국인 최초이며 '사요나라'(1957)의 우메키 미요시 이후 64년 만에 역대 두 번째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아시아 배우라는 기록을 세웠다.

1947년 생인 윤여정은 1966년 TBC 3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그는 1971년 MBC '장희빈'에서 악녀 장희빈 역을 맡아 대박을 냈다. 그해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로 스크린 데뷔, 본격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윤여정은 김 감독의 '충녀'에도 출연하며 '김기영의 페르소나'로 불리기도 했다.


전성기였던 1975년 가수 조영남과 결혼해 배우 생활을 쉬고 미국에서 생활했다. 여배우가 결혼하면 은퇴가 당연하던 시절이어서 그는 긴 공백기를 갖게 됐다. 하지만 미국 생활은 그가 외신들과 영어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됐다.

윤여정은 결혼 13년 만에 조영남과 이혼한 뒤 슬하의 두 아들을 양육하기 위해 연예계에 복귀했다. 90년대 드라마 '사랑과 야망',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2000년대 '굳세어라 금순아', '넝쿨째 굴러온 당신', '디어 마이 프렌즈' 등 작품에서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열연했다.

특히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종로 일대의 가난한 노인을 상대하는 박카스 할머니를 연기해 '명불허전'이란 평가를 받았다.

윤여정은 '생계형 배우'였던 과거를 돌아보며 '하고 싶은 사람과 하고 싶은 작품을 골라 하는 것'이 '60대 이후 누리는 사치'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나영석 PD의 예능 '꽃보다 누나', '윤식당', '윤스테이' 등에 출연해 세대를 뛰어 넘는 쿨한 입담, 모던하고 세련된 패션센스를 뽐내며 55년째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2021년, 윤여정은 74세의 나이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미나리'에서 윤여정은 미국 남부 아칸소주 시골로 이주한 딸 모니카(한예리)를 돕기 위해 한국에서 건너간 할머니 순자 역을 연기했다.

윤여정은 할머니 순자를 전형적이지 않은 살아있는 연기로 표현하며 국내외 호평을 받았다. 결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까지 접수하며 102년 한국 영화계의 첫 금자탑을 세우게 됐다. 그는 애플 플러스의 드라마 '파친코' 촬영을 하는 등 해외에서도 뜨거운 러브콜을 받고 있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