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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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페스트'

출판계에도 수혜주가 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지난해 대표적인 코로나 수혜주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문학사상 가장 예의없게 시작하는 《이방인》보다 프랑스 어느 항구 도시의 감염병 연대기에 더 호응하는 시절은 국내에 《페스트》가 번역된 이래 처음이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앞으로도 이런 광경은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난세 버틴 '페스트' 리유·'스위트홈' 현수가 묻다…"당신은 선량한가, 살아남아 지킬 게 있나"
《페스트》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류의 고전은 아니다. 인기있는 고전 작품에는 대체로 ‘쓸모없는’ 인간이 등장해 이해받을 수 없는 선택을 일삼다가 비유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세상을 등진다. 그들은 외톨이거나 반항아며, 낙오자거나 패륜아다. 혹은 그 모두이거나.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고전으로 손꼽히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만 봐도 이런 내 말이 과장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모친의 사망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뫼르소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고. 문학의 영웅들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스스로를 파멸하는 인간만이 문학의 영웅이 된다. 고통은 그들의 훈장이며 상처의 연대기는 인류의 자부심이다.

하지만 《페스트》에는 세상을 등진 영웅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페스트》의 영웅 리유는 세상을 정면으로 끌어안는다. 이런 숭고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매력이 없다고 여겨지지만 난세의 영웅은 홀로 튀는 이방인이 아니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인간은 더욱.

리유의 활약이 돋보이는 소설 《페스트》의 줄거리는 이렇다. 오랑에 페스트가 퍼지자 정부는 오랑을 페스트 재해 지구로 선포하고 도시를 봉쇄한다. 책임자들은 사건의 실체를 부정하다가 더는 부정할 수 없을 때 마지못해 시인하지만 그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만큼은 한사코 거부한다. 그때도 유효한 작품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사실이 고전의 빛이라면 그때의 문제가 지금도 여전히 문제라는 사실은 고전의 그림자일 것이다.

아무튼, 카뮈는 이 소설을 1941년 쓰기 시작해 1947년 발표했다. 작품의 기폭제가 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며 페스트는 전쟁으로 대표되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비유다. 불가해한 현실의 한복판에 던져졌을 때 인간이 ‘보이는’ 양상과 ‘보여야 할’ 태도를 말하기 위해 카뮈는 이 소설을 썼다.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인간은 현실을 부정하고 외면하고 회피한다. “솔직하게 당신 생각을 말해 주시오. 당신은 이것이 페스트라고 확신하십니까?” 사태가 페스트임을 확증할 수 있냐는 보건당국의 질문에 리유는 대답한다. “질문을 잘못하셨습니다. 이건 어휘의 문제가 아니고 시간 문제입니다.” 파리에서 취재차 오랑에 왔다 발이 묶인 신문기자 랑베르도 리유에게 반문한다. “하지만 나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닌데요!” 리유는 대답한다. “지금부터는 유감입니다만, 선생은 이 고장 사람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리유에게 현실은 구분하고 명명하는 언어적 개념이 아니다. 살아남고 살리는 구체적 행위들이다.

부조리한 일이 대개 그렇듯 페스트가 사라지는 데 인간이 기여한 바는 없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과 같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그러나 페스트 이후, 페스트 이전의 세계관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성직자의 공허한 믿음이나 행정가의 비겁한 숫자는 힘을 잃는다. 오직 선량한 시민들의 희생과 연대만이 힘을 가진다. 예컨대 전시 상황에선 신도 없고 국가도 없다. 각자의 선량한 행동만이 리유가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고 기록할 수 있는 이유다. 생명이 위협받는 시대에 카뮈의 실존주의는 언제나 맨 처음 소환된다.

드라마 '스위트홈'
"살아남아라 그리고 다른 이를 구하라"

난세 버틴 '페스트' 리유·'스위트홈' 현수가 묻다…"당신은 선량한가, 살아남아 지킬 게 있나"
‘각자도생’하면서도 연대 의식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스위트홈’은 다시 쓴 《페스트》 같다. 사실 좀비물은 내 취향이 아니다. 번번이 도전하지만 역시 내 취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물러선 작품만 수십 편이다. 물리면 예외없이 괴물로 강등되는 획일적이고 급격한 변화가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다. 괴물이 되는 것보다 같은 욕망을 가진 복제품으로 전락한다는 설정이 더 끔찍하다.

안다. 이런 얘기가 장르 코드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사람의 괜한 트집으로 들린다는 거. 다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란 걸 ‘스위트홈’을 보며 알았다. ‘스위트홈’의 모티프는 ‘괴물화’ 과정이다. 획일적이고 급격하게 변하는 좀비와 달리 괴물화 단계의 존재는 중간 지대에서 격렬하게 정체한다.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변해가는 과정이 다를 수 있다는 상상력. 혹은 괴물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주인공 차현수는 인간과 괴물 사이에 있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처럼 괴물과 싸우다 신체를 손상당해도 불굴의, 강력한, 믿을 수 없는 정신력으로 버티면 괴물화를 지연시킬 수 있다. 여기서 이 드라마의 다소 전근대적인 주제 의식이 드러난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호랑이 굴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게 덜 차린 정신 때문은 아닐 것이므로. ‘존버’는 이미 삶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출판물 사이에선 폐기된 개념이나 다름없다. 그만둬라! 더 빨리 그만둬라!! 퇴사를 권하는 사회에서 버티라는 건 시대착오적 주문처럼 보인다.

다만 ‘스위트홈’에 등장하는 존버의 미덕에는 좀 다른 맥락이 있다. 좋은 때가 오기를 그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침략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최대치로 발현하는 버팀이기 때문이다. 학교폭력 피해자였고 히키코모리였으며 자살만이 유일한 목표였던 차현수를 도와주는 사람은 일찍이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완벽한’ 외톨이였다. 그런데 괴물화 이전엔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오히려 약함의 상징이었던 그의 선량함이 아이러니컬하게도 망한 세상에선 모두가 괴물이 될 때 그를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유일하고 실제적인 이유가 된다. 그의 힘은 그의 선량함에 비례한다. 타자를 배척하는 각자도생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각자도생이 ‘스위트홈’이 말하는 버팀의 실체다.

스스로 살아남을 것. 그런 다음 다른 생명을 도울 것.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고 썼던 의사 리유에게는 차현수가 바로 그 선량한 시민, 말하자면 ‘인간’이다.

위대한 인간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인간이 위대하다. 70년 간격으로 발표된 두 작품은 한목소리로 난세의 진실을 말하는 것 같다. 당신은 지킬 것이 있는가. 말하자면, 선량한 사람인가.

박혜진 <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