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 ‘사유-생로병사’
이종구 ‘사유-생로병사’
높이 12.1m, 폭 7.7m의 초대형 불화(佛畵)가 시선을 압도한다. 장엄한 광채를 뿜으며 설법 중인 석가모니불을 두 보살과 사천왕이 모시고 있다. 화려하고 다양한 색채와 섬세한 필선이 돋보인다. 2008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처음 전시된 뒤 13년 만에 절 바깥으로 나온 국보 제301호 ‘화엄사영산회괘불탱’이다. 그런데 작품만큼이나 걸린 장소가 놀랍다. 한국 최대 천주교 성지에 자리잡은 서울 중림동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라서다.

부처님오신날(5월 19일)을 한 달여 앞두고 종교 간 화합의 메시지를 담은 두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현대불교미술전 ‘空(공) Sunyata’과 서울 삼청동 공근혜갤러리의 ‘Reflections(반영)’이다.

서소문성지에서 불교미술전을 연 건 파격적인 시도다. 노상균 이용백 이인 등 작가 13명의 불교를 소재로 한 작품 30점에 국보로 지정된 불화까지 빌려왔다. 일부 천주교 신자는 거세게 항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박물관 관장 원종현 신부는 담담했다. “서소문성지는 천주교만의 성지가 아닙니다. 유학 외의 종교나 학문은 배척되던 시절, 참으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신앙으로 인해 조선시대 공식 처형장이 있던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화엄사영산회괘불이 그려진 때는 병자호란(1636~1637년)의 상흔이 아직 남아 있던 1653년. 피폐해진 조선 민중들에게 그림은 불보살의 자비와 위로를 전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인간의 생명과 존엄이 위태로워진 지금의 상황과 들어맞는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화엄사 주지 덕문 스님은 대여 요청에 흔쾌히 “가져가십시오”라고 답했다고 한다. 원 신부는 “오는 11월에도 16~19세기에 그려진 러시아정교회의 성화(聖畵) 60여 점을 특별 전시할 계획”이라며 “앞으로도 종교를 떠나 감동을 주는 작품들을 계속 전시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서 눈에 띄는 작품 중 하나는 전상용의 ‘효명’이다. 수행자를 조각한 석고상이 전시장 한쪽에서 다른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다. 평온하게 앉아있는 자세와 깨달음을 얻은 듯한 얼굴 표정은 ‘동틀 무렵의 그윽한 어두움’을 형상화했다는 설명이다. 윤동천의 ‘너는 나다’는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산업재해로 숨진 김용균 씨의 유품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설치작품이다. 전시는 6월 30일까지.

공근혜갤러리에서는 독실한 기독교인 작가 두 명이 불교를 소재로 작업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영국 출신인 세계적 사진작가 마이클 케나의 사진 25점과 설치미술가 김승영의 설치작품 3점이다.

김승영 ‘슬픔’
김승영 ‘슬픔’
전시장 가운데 벽돌벽 위에 놓인 반가사유상은 설치미술가 김승영의 ‘슬픔’이다. 원작과 달리 조각의 손이 눈가로 올라가 있고 입꼬리가 내려간 표정은 우울하다. 하지만 벽돌벽 사이에 돋아난 이끼는 화해를 통한 치유의 메시지를 전한다. 전시장 벽에 걸린 불상과 산사 풍경 사진들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이클 케나가 촬영한 사진들로, 1987년부터 30년 넘게 한국과 일본 라오스 베트남 등 아시아 전역에서 촬영한 불상 사진들이 이번에 세계 최초로 공개됐다.

케나는 어린 시절 7년간 신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을 정도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다. 불교를 접한 뒤 사찰과 불상의 신비한 매력에 푹 빠졌다. 제주도 존자암지를 촬영한 ‘사찰과 등불’에서는 산사의 고요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김승영은 공근혜갤러리와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전시에 모두 참여했다. 둥근 원형 조각 안에서 물이 잔잔하게 소용돌이치는 설치작품 ‘마음’은 불교적인 정중동(靜中動)의 내면을 표현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뉴욕 현대미술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서 다양한 문화권의 예술가들을 만나면서 마음이 트였다”며 “포용을 강조하는 불교를 통해 종교 간 화합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전시는 다음달 23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