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영화제 황금사자상 원작 논픽션 '노마드랜드' 번역출간

21세기 미국에서는 새로운 유랑(nomad) 부족이 떠오르고 있다.

집 대신 밴이나 레저용 차량(RV·Recreational Vehicle), 여행용 트레일러, 낡은 세단에 들어가 산다.

중산층에서 몰락한 이들은 자신을 '홈리스'가 아닌 '하우스리스'라고 부른다.

얼핏 보면 은퇴한 RV족으로 오인될 수 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집을 포기해야 했고, 그럭저럭만 살기에도 '401k'(퇴직연금)가 부족해 육체노동 일자리를 찾아 대형마트 주차장이나 교외의 거리, 트럭 휴게소를 옮겨 다니는 이들이다.

미국 저널리스트 제시카 브루더가 쓴 논픽션 '노마드랜드'(NOMADLAND, 엘리 펴냄)는 이런 '노마드'의 실태와 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안내하는 르포르타주다.

죽을 때까지 떠돌며 일한다…몰락한 미국 중산층의 '유랑 노동'
저자는 낡은 SUV에 트레일러를 끌고 다니는 예순 네살 여성, 린다 메이를 중심으로 3년 동안 2만4천140㎞를 여행하며 만난 노마드들의 사연을 생생하게 전한다.

두 자녀를 키워낸 싱글맘인 린다는 나이가 들수록 더 고되고, 더 낮은 임금의 일자리로 몰려났다.

건축공학 학위 2개와 대형 유통업계 사무직 경력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고 결국 결혼한 딸의 집에 얹혀살게 된다.

그러나 사위도 직장을 잃고 손녀의 병원비 부담은 커지자, 현관 옆 소파에서 기거하던 린다는 중고 트레일러를 장만해 딸의 집에서 떠난다.

유일한 버팀목인 퇴직연금은 고작 500달러(약 56만원)에 그쳐 죽는 날까지 노동해야 할 운명인 린다가 지금 찾은 일자리는 국유림에 있는 캠핑장 관리 업무다.

운이 좋으면 주당 40시간을 채워서 최저임금보다 조금 더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여름 한 철일 뿐이고, 그것도 예고 없이 해고될 수 있다.

구인광고는 "캠핑하면서 돈도 버세요"라고 유혹하지만, 주 60시간 이상 일해도 초과근무 수당을 못 받고 캠핑장 내 수없이 많은 구덩이형 화장실을 하루에도 몇 번씩 청소해야 하며 42도의 폭염에도 연일 일하다 열사병으로 구급차에 실려 가는 등 은퇴한 중산층에겐 버거운 육체노동이다.

린다와 같은 노마드들은 고용주에게는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일을 가장 낮은 임금에 시킬 수 있고, 언제든 해고할 수 있는 노동자들이다.

죽을 때까지 떠돌며 일한다…몰락한 미국 중산층의 '유랑 노동'
이런 노동자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고용하는 기업은 세계 최대 기업 아마존이다.

크리스마스 성수기에 폭증하는 물량을 감당하기 위해 노마드 노동자들을 모집하는 '캠퍼 포스'(Camper Force)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저자는 2014년에 캠퍼포스 관리자에게 프로그램 규모를 슬쩍 물어보자 대략 2천명 정도일 것이라는 답을 들었다고 한다.

2016년 시즌에는 아마존이 캠퍼포스 모집을 평년보다 일찍 중단했는데 이는 지원자가 기록적으로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캠퍼포스 노동자들의 교대 근무는 10시간에서 12시간 정도 이어지며 이들은 제품을 바코드 스캔하고, 분류하고, 상자에 담는 일을 한다.

몸을 굽히고, 쪼그려 앉고, 계단을 오르면서 24㎞ 이상 콘크리트 바닥 위를 걷기도 한다.

예순 여덟살 버스 운전사 출신의 한 남성은 5주가 지나 캠퍼포스를 떠났다고 한다.

오랜 시간 콘크리트 위를 걷은 일을 두 무릎이 견디지 못해서였다.

비공개 페이스북 그룹 '아마존 캠퍼포스 모임'에서는 한 여성이 3개월 근무하는 동안 11.3㎏이 빠졌다는 게시물을 올렸다.

다른 노동자는 12주 반 동안 1천319㎞를 걸은 자신의 스마트워치 기록을 올렸다.

저자가 들어가 본 이들의 RV는 이동식 약제실 같았다고 한다.

소염제, 진통제 등을 갖춰놓고 있었다고 한다.

족저근막염, 건염, 손가락 통증 등을 앓는 이들은 RV에 약이 떨어져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아마존 창고에는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진통제를 제공하는 자동판매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연말 특수가 끝나 캠퍼포스가 필요 없어진 아마존은 이들을 해고하며 노동자들은 RV와 트레일러 등을 몰고 떠난다.

아마존 관리자들은 유쾌하게 이를 '후미등 행렬'(taillight parade)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수년 전 제프 베이조스는 2020년까지 미국의 '워커 캠퍼' 가운데 4분의 1이 아마존과 일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린다도 캠프장 관리 일이 끝나면 이 네 명 중 한 명이 된다.

이 책은 저자가 2014년 하퍼스 매거진에 기고한 글 '은퇴의 종말: 노동을 그만둔 삶을 감당할 수 없어질 때'를 토대로 추가 취재와 자료 조사를 더해 쓴 것으로 미국에서는 2017년 'NOMADLAND'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치부를 샅샅이 드러낸 이 책은 수년의 차이는 있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투영된다.

치솟는 주거비용, 과로사가 이어지는 물류센터 등의 열악한 노동환경, 충분치 못한 사회보장제도 등 때문이다.

이 책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노매드랜드'는 지난해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는 등 200여 개의 상을 휩쓸었으며 아카데미 작품상 유력 후보작으로 꼽힌다.

서제인 옮김. 440쪽. 1만7천500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