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피망 - 유진목(1981~)
씨앗을 받아 쥐고
묽게 번지는 여름을 본다.

손가락 사이로
우리가 사랑한 계절이 흐르고 있다.

내가 주먹을 쥐면
너는 그것을 감싸고

내가 숨을 쉬면
너는 그것을 마시고

처음과 나중이 초록인 세계에서

피망의 이름으로 눈을 감았다.

시집 《작가의 탄생》(민음사) 中

봄날이 한창입니다. 어느새 새싹이 자라는 계절이 왔어요. 작년의 오늘은 조금 쌀쌀했던 것 같은데 올해의 계절감은 사뭇 따스합니다. 저에게 3월은 기억하고 싶은 계절이에요. 기억하고 싶은 순간은 왜 계절감으로 찾아올까요. 단단한 껍질 안에 텅 빈 것을 감싸고 있는 피망처럼 공허한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계절입니다. 손가락 사이로 숨을 불어넣어 주고 싶은 사람과 나란히 걷기에 좋은 날, 당신이 걷는 모든 거리의 처음과 나중이 초록인 세계이길 바라요.

이서하 시인(2016 한경신춘문예 당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