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대원군의 개혁, 쇄국정책과 조선의 개항
미국이 처음 공격한 강화도의 초지진.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미국이 처음 공격한 강화도의 초지진.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개혁인가 신보수인가?
개방인가 쇄국인가?

어느 시대, 어느 집단을 막론하고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이 힘겨운 과제를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따라 백성의 운명이 결정됐다.

조선은 백성에게 가난과 질병, 부패와 공권력의 폭력을 안긴 불행한 체제였다. 조선은 정조의 죽음 이후 60여 년 동안 세도정치가 지속됐다. 소수 가문이 왕권을 능가하는 정치권력과 경제, 문화 등을 장악했고, 관직의 매매 등 부패를 일상화시켰다.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은 죽거나 민란을 일으켰다. 일부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만주에 정착했다.

이러한 상황인 1863년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역사에 등장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그에게는 시대적인 과제와 사명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는 왕권의 확립과 세도정치의 척결을 통한 정치개혁과 실학 이후 신사상이 추구한 체제의 변화였다. 대원군은 신속하게 중앙과 지방에 포진한 세도정치의 주역과 동조세력을 숙청하고, 비변사를 폐지해 정치권과 군사권을 분리했다. 정치·문화 이데올르기의 산실이며, 재산권 및 권력투쟁과 직결된 수 많은 서원을 47개만 빼고는 철폐했다. 양반들의 특권으로 병역 대신 부과했던 군포를 다시 거둬들였고, 사창제도 등을 실시해 민생을 안정시켰다. 이러한 개혁정책들은 구권력의 인적, 기득권의 물적 토대를 일소했고, 자신을 중심으로 신권력을 창출하는데 성공적이었다. 백성도 환호했다.

하지만 대원군이 왕실의 권위회복을 목적으로 추진한 경복궁의 재건은 무리한 개혁을 좌초시켰다. 백성들을 무리하게 징발했고, 재정 부족 때문에 발행한 당백전은 초기 단계에서 화폐경제의 인플레이션을 발생시켰다. 세금을 걷는데 차질이 생겼고, 백성들의 삶을 더욱더 힘들게 만들었다. 원납전을 부과해 관청과 지주들의 자진 기부를 유도했지만 결국은 백성들의 부담으로 돌아왔다. 대원군은 100년 가까이 성장한 실학자들의 존재와 연구, 정책 대안들을 소홀히 했다. 오히려 천주교와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탄압하기까지 했다.

둘째, 천주교의 수용과 서양세력의 개항 요구에 대한 합리적인 대응이었다. 서학과 천주교는 병자호란 직후부터 영향을 끼쳤지만, 신앙과 학문의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18세기 후반부터는 서양인들이 탄 이양선들이 해안에 출몰했고, 호기심과 두려움이 교차했던 조선은 쇄국정책을 강하게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서양지도에 기록됐고, 이후 독도 갈등의 씨앗이 된 것이다. 서양인들이 동아시아의 질서 재편 작업에 구체적으로 시작한다는 신호탄이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 조선을 둘러싼 세계질서와 열강들의 움직임은 어떠했을까?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면서 근대지향적인 나라로 탈바꿈했다. 애국심에 불타는 지식인과 하급 무사들은 부국강병을 주장하며, 홋카이도, 유구, 타이완과 조선 등을 점령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등은 ‘정한론’을 주장했다. 군사력을 증강했고, 특히 서양의 해군력을 본 병부성은 20년에 걸쳐 군함 200척 및 운송선 20척을 건조하자는 계획을 건의했다. 이를 계기로 장갑함을 비롯한 수입품으로 무장한 근대 해군이 탄생했다. 1871년부터 신분해방령을 내리고 국민이 초등교육을 받도록 했고, 평민들도 군인이 될 수 있는 징병령까지 만들었다. 1871년에서 1873년 사이에 영국, 미국, 프랑스 등에 국비유학생을 대거 파견했는데, 그 비용이 1872~1873년 교육 예산의 약 10%였다(성희엽, 『조용한 혁명』).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이 상륙했던 갑곶 돈대,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이 상륙했던 갑곶 돈대,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청나라는 영국과 불평등 조약인 남경조약을 맺었고, 1844년에는 미국, 프랑스와도 동일한 조약을 맺었다. 러시아와는 1858년에 아이훈 조약, 1860년에 베이징 조약을 맺어 헤이룽강 이북과 연해주 땅 100만 ㎢를 빼앗겼다. 일본과는 1871년에 상호평등의 관계로 전환되는 ‘청일수호조규’를 맺었다. 서양의 압력을 막으려면 일본과 연합해야 한다는 ‘연일제서聯日制西’라는 논리 때문이었다.

이 시대 러시아는 조선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친 나라였다. 일본과 1875년 5월 러일 화친조약을 맺어 사할린을 영토로 인정받았다. 반면에 일본은 쿠릴열도의 18개 섬 전체를 양도받았고, 홋카이도를 영토로 삼을 수 있는 권리까지 얻었다. 이후 러시아는 동아시아의 질서에 직접 영향을 끼쳤고, 조선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그러자 위협을 감지한 영국, 프랑스 등 유럽국가들과 신흥 태평양 세력인 미국은 대항마로서 일본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은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의 구도를 파악하여 서구 열강을 이용했다.

미국은 1847년에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승리한 후에 태평양에 진출했으며, 포경선들을 북태평양 어장으로 진출시켜 러시아와 부딪혔다. 1853년도에 ‘포함외교(Gun boat Diplomacy)’를 강행해, 1854년에 미일 화친조약을 체결하였다. 1865년에는 남북전쟁을 종결시켰고, 1869년에는 대륙횡단철도를 완성해 대서양과 태평양을 아우르는 ‘양양(兩洋)국가’로 변신했다. 이때부터 조선을 비롯해 청나라, 필리핀 등과 캄차카 반도, 쿠릴 열도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운명은 미국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윤명철, 『동아시아의 해양영토분쟁과 역사갈등 연구』).
어재연 장군등이 혈전을 벌인 광성돈대.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어재연 장군등이 혈전을 벌인 광성돈대.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이렇게 긴박한 상황 속에서 실권자였던 대원군은 서해안의 모든 관청에 외국 선박과의 교섭 금지령을 내렸고, 프랑스 신부들과 신도들을 죽였다. 주청 프랑스 공사관은 이를 조선을 개항시키는 빌미로 활용하려고 함대를 파견했다. 이렇게 해서 1866년 9월에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두 척의 군함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목동 입구인 염창에 정박하고, 다음날에 양화진(양화대교)까지 접근하자 도성은 공포에 휩싸였다. 곧 산둥으로 회항한 함대는 준비를 마친 후에 10월 14일. 군함 4척으로 강화도에 진입해 갑곶진을 점령했다. 이어 벌어진 문수산성 전투에서 포수와 전국에서 동원된 보부상 및 지역주민들과 합동작전을 벌인 조선군과 싸우다가 퇴각했다. 이때 엄청난 규모의 은괴와 외규장각 도서를 비롯한 숱한 문화재들을 약탈했다.

그 얼마 전인 음력 7월에는 ‘제너럴셔먼호’라는 미국 상선이 대동강을 타고 올라와 평양에 정박했다가 정부와 백성들의 공격으로 배가 전소됐고, 선원들은 몰살당했다. 미국은 5년이 지난 1871년에 이 사건을 빌미로 나가사키 항을 출항한 군함 5척으로 강화도를 공격했다. 강화도의 초입인 초지진을 점령했고, 다음날에는 옆의 덕진진과 광성보를 공격했다. 신미양요가 일어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을 비롯해 최소한 253명의 군인과 다수의 백성들이 전사했다. 반면 미국은 단 3명 만이 전사했을 뿐이다. 국가와 군대가 백성에게 주는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대원군은 두 번의 ‘양요’에서 승리했다고 자처하면서 쇄국정책이 옳았음을 주장하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하지만 조선은 전투에서 졌고, 다수의 백성이 죽었으며, 불과 4년 후 발생할 일본의 공격을 예방하는 교훈조차 못 얻었다.
건너편 김포의 덕포진과 함께 화망을 구성했던 덕진진의 남장포대.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건너편 김포의 덕포진과 함께 화망을 구성했던 덕진진의 남장포대.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이 무렵 일본은 서양을 자기화하면서 주변 국가들을 침략했다. 1872년에 류큐 왕국을 류큐 번으로 만들었고, 1874년 5월에는 대만을 침공했으며, 1875년에는 유구국을 점령해 1879년에 오키나와현(沖繩縣)으로 만들었다. 다음 단계는 조선이었고, 열강들은 이를 예측했다. 하지만 물러난 대원군도, 고종과 명성황후의 친정체제도 무능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예고 없이 부산항에 입항했고, 운요호를 비롯한 함대 3척이 강화 해안에 상륙해 조선군을 패배시켰다. 이어 ‘조선병탄론’ 등 시나리오대로 움직여 열강들에 외교전을 펼쳤고, 군함 3척과 수송선 3척에 전권대표와 해병대 등 800여 명을 태우고 강화도 연안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결국 조선의 신 정권은 최초의 근대조약이면서 불평등 조약인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사대교린 외교체제는 무너졌고, 조선은 청나라에서 벗어난 자주국으로 변신해 일본에게 종속되기 편하게 변형됐다. 신정부는 자국책을 강구해 서양 세력들과 근대조약을 맺으면서 개항과 또 다른 개혁을 선택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놓고 ‘조선의 멸망을 늦추었다’, ‘조선이 회생할 기회를 상실했다’ 등 상반된 평가들이 난무한다. 그 무렵의 조선은 외국 세력과 정면 대결하거나 무조건 거부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세계사적인 전환기와 질서재편의 혼란기에는 우연이 존재하고, 약자의 도약도 가능하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그렇다면 비록 실패할 확률이 높았어도 지연이라는 시차 작전과 강온 양면의 외교술을 발휘해볼 만한 여지는 있었다.

대원군의 역사적인 성격과 정책들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교훈을 준다.

사회 개혁은 사적인 경험과 교조적인 행동으로는 성사될 수 없다. 신념보다는 자유심, 명분보다는 필요성, 사심보다는 공감이 더 효율성이 높은 것이다. 백성들은 전 시대의 폭정에 반동적인 존재로 대원군을 지지했지만, 결국은 등을 돌렸다. 이로 인해 절망한 백성은 국가 의식이 희박해졌고, 이는 구한말 외국인들의 기록에 보이듯 조선 멸망에 큰 요인이 됐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백성들도 결국은 역사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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