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재 개인전 17일 개막
윤석남이 초상으로 되살린 여성독립운동가들

1932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국제연맹이 중국 하얼빈에 조사단을 파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의 여성 독립운동가는 그곳으로 달려가 독립 의지를 알리고자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랐다.

피가 흐르는 손가락으로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조선은 독립을 원한다)'이라는 혈서를 써 자른 손가락 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보냈다.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연기한 여주인공의 실제 모델인 남자현(1872~1933)이다.

이듬해 봄에는 일본전권대사이자 관동군사령관 무토 노부요시 암살 계획을 세웠다.

거사 직전 체포돼 큰 뜻을 이루지 못한 그는 고문과 단식으로 건강이 악화해 그해 8월 숨을 거뒀다.

한국 여성주의 미술 대모로 불리는 윤석남(82)이 남자현을 비롯해 일제에 맞서 싸운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을 되살렸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에서 17일 개막한 개인전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대형 초상 연작을 선보인다.

강주룡, 권기옥, 김마리아, 김명시, 김알렉산드라, 김옥련, 남자현, 박자혜, 박진홍, 박차정, 안경신, 이화림, 정정화, 정칠성 등 14인을 그린 채색화와 연필 드로잉이 전시됐다.

남자현의 초상에서는 자른 손가락을 흰 천으로 감싼 모습이 보인다.

피가 배어 나오지만 굳게 주먹을 쥔 오른손과 표정에서 결연함이 묻어난다.

세로 선이 그어진 주황색 벽이 흰 한복과 대비되며 강인한 의지가 강조된다.

윤석남은 "손가락을 자르고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는 글을 쓰는 장면을 상상하며 그리면서 소름이 끼쳤다"고 말했다.

영화를 계기로 남자현의 삶이 재조명되기도 했지만, 그동안 항일투쟁에서 활약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남성과 달리 여성 독립운동가는 유관순을 제외하면 금방 떠오르지 않는 게 현실이다.

윤석남이 초상으로 되살린 여성독립운동가들

윤석남은 소외된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주목하고 그들을 초상으로 복원했다.

자료가 부족한 탓에 사진을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작품을 완성했다.

전통 기법으로 그린 채색화는 인물들의 서사와 강렬한 색채가 어우러져 큰 울림을 전한다.

학고재 본관에 들어서면 먼저 박자혜(1895~1943)의 초상을 마주하게 된다.

독립운동가 신채호(1880~1936)의 아내로 알려진 인물로, 그 역시 나라를 위해 싸웠다.

1919년 3·1운동 당시 간호사로 부상자들을 치료하다 민족적 울분을 느낀 그는 간호사들을 모아 간우회를 조직해 만세 시위와 동맹파업을 시도했다.

초상화는 여순감옥에서 옥사한 남편 신채호의 유골함을 든 박자혜의 모습을 담았다.

새빨간 천으로 감싼 유골함을 두 손으로 받쳐 든 박자혜의 입을 꽉 다문 얼굴에 슬픔과 분노가 동시에 스친다.

초상 속 인물들의 손은 얼굴만큼 크고 거칠다.

작가는 "사람을 그릴 때 손이 전체를 상징하는 느낌"이라며 "내게는 손이 가진 의미가 크다"라고 설명했다.

윤석남이 갑자기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초상을 그린 것은 아니다.

서양화를 그리던 작가는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선 시대 화가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그길로 한국화를 배웠다.

여성들의 초상을 그린 채색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가족과 주변 인물들의 초상을 거쳐 윤석남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기록하기로 했다.

역사가 충분히 주목하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그리는 작업은 여성의 삶을 그려온 윤석남의 열정을 더욱 뜨겁게 했다.

80대 원로작가는 여성 독립운동가 100인의 초상을 완성할 계획이다.

윤석남이 그린 인물들의 삶에 소설적 상상력을 더해 풀어낸 소설가 김이경의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 역사를 뒤흔든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도 출간됐다.

전시는 4월 3일까지.
윤석남이 초상으로 되살린 여성독립운동가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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