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에 전 재산 바치고 중국서 쓸쓸히 생 마감"

"칼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연마코 / 새론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 내어 / 새 나라 세울 이 뉘뇨∼"
항일무장투쟁의 요람인 신흥무관학교 교가가 16일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이석영 뉴미디어 도서관'에 울려 퍼졌다.

전 재산을 바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의 첫 추모식이자 장례식이 열렸다.

이석영 선생은 87년 전 중국에서 순국했으나 직계 후손이 없어 그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상하이 공동묘지에 안장됐으나 도시개발로 유해도 사라졌다.

이날 추모식은 약력 소개, 기념사, 추모사, 헌화, 추모가 합창, 유족 대표 인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막고자 최소 인원만 참석했다.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 이석영 선생 추모식 추진위원장은 기념사에서 "1934년 중국 상하이 빈민가의 어느 다락방에서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쓸쓸하게 세상을 등진 한국의 노인이었다"며 "부음이 전해진 후 언론에서 취재한바 조선의 거부(巨富) 이석영 선생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남양주시민의 따뜻한 뜻으로 그분의 위업이 하나씩 복원되고 있다"며 "87년 만에 처음으로 그분의 추모식을 거행하는 대단히 가슴 벅찬 날"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이석영 선생은 당대 최고의 재산가로 평생 편안함과 부를 누릴 수 있었으나 나라가 일제에 의해 병탄 되자 결연히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가산을 팔아 망명길에 올랐다"며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투쟁의 간성을 양성하는데 가산을 모두 투자했다"고 추모했다.

이석영 선생 순국 87년만에 남양주서 첫 추모·장례식
이석영 선생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형제들과 결의해 1910년 12월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면서 화도읍 가곡리 땅을 모두 팔아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땅을 판 돈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해방될 때까지 광복군의 주축이면서 청산리 대첩 등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1918년 일제의 지명수배로 이석영 선생은 선양, 베이징, 텐진, 상하이 등으로 피신, 빈곤하게 생활했다.

그의 가족들은 1927년 일제에 몰살당했다.

이석영 선생은 1934년 2월 16일 상하이에서 80세의 나이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으며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당시 임시정부는 항저우로 피신 중이어서 임시로 장례를 치렀으나 일제의 공격으로 전란이 격화한데다 직계 후손조차 없어 묘지를 살피지 못했다.

이후 공동묘지 일대가 개발돼 이석영 선생의 유해를 찾을 수 없다.

이석영 선생은 형제인 우당 이회영 선생,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 등과 달리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91년에서야 건국훈장을 받았다.

네 번째 등급인 '애국장'에 추서됐다.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순이다.

지난해에는 정부가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기도 했다.

조광한 남양주시장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선생이 있었기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라며 "남양주 역사에 여전히 살아있는 선생의 이름 석 자를 도시 곳곳에 새겨 후대에도 기억되도록 마음과 힘을 다하겠다"며 밝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