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정치권력과 사상투쟁인 당쟁

왕권과 신권의 대결…권력과 사상투쟁
숙종, 국왕이 주도하는 세 번의 환국
서울 성곽.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서울 성곽.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왕권과 신권(臣權)의 대결은 태조 때부터 시작된 조선체제의 불가피한 특성이었다. 관료이자 학자들 간의 권력과 사상투쟁인 당쟁은 숙명이었다.

환국(換局)은 일반적인 당쟁과 달리 국왕이 주도해 ‘국면 전환’ 즉 기존의 권력 집단을 빠르고 비일상적인 방식으로 교체시킨 정변이자 친위 쿠데타이다. 현종의 외아들이었던 숙종은 2명의 왕비와 빈들이 연관된 추악하고, 비윤리적인 세 번의 환국을 일으켜 왕권을 강화했다.

첫 번째는 1680년에 일어난 ‘경신환국’이다. 13세에 등극한 숙종은 현종 때에 벌어졌던 예송논쟁에서 승리한 남인을 중용하고 외척에 의지했다. 그러나 6년 동안 정치를 경험한 그는 왕권을 강화하는 비상 조처를 취했다. 영의정인 허적이 궁중의 법도를 어기는 사소한 행동을 빌미로 자신의 장인을 훈련대장에 임명해 병권을 장악했다. 신속하게 영의정과 도승지, 삼사의 요직을 교체했다. 그 직후에 공교롭게도 남인들이 인조의 손자인 복창군 3형제들과 반역을 도모한다는 고발사건이 생기자 즉각 관련자들과 복창군 등 두 형제를 죽였다. 이어 영의정인 허적을 비롯해 윤휴 등 남인들을 죽이고 일부는 유배 보냈다. 그리고 최고의 성리학자로 대우받고 있는 송시열을 고향에서 불러올려 재등용시키면서 조정을 순식간에 서인으로 교체했다. 때마침 왕비가 죽자 서인의 딸인 인현왕후를 새 중전으로 맞이하면서 20세의 청년왕은 친위 쿠데타를 이용해 전광석화처럼 권력의 틀을 바꿨다.

세번의 환국…정치권력·사상투쟁에 사로잡힌 조선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두 번째는 1689년에 일어난 ‘기사환국’이다. 역관 집안 출신으로 궁녀였던 장옥정은 숙종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았지만, 숙종의 어머니였던 명성왕후의 미움을 받아 궁에서 쫓겨났다. 다시 들어온 장씨가 아들(경종)을 낳자, 숙종은 왕비의 소생도 아닌 데다 난지 1년 밖에 안 된 왕자를 세자로 책봉했다. 더구나 인현왕후는 아직 젊어서 원자를 생산할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숙종은 숙원인 장씨를 희빈으로 승격시켰다. 조선의 당쟁과 궁중비사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닌 장희빈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등장한 것이다. 의도가 분명치 않은 숙종의 결정은 성리학의 명분과 정통론에 분명 어긋나는 일이었다. 더구나 희빈의 오촌 아버지인 장영은 경신환국 때 유배당했던 남인 계열이었다.

서인은 집단으로 반발했고, 영수이면서 이론가인 송시열은 중국의 예까지 들어가면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숙종은 바로 그날로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지방으로 쫓아냈다가 사약을 내렸다. 많은 서인은 옥에서 죽거나 사약을 받았고, 남구만 등 일부는 지방으로 유배됐다. 왕은 빠른 속도로 중요한 관직을 남인들로 교체한 후에 인현왕후를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켜 사가로 내보냈고, 장희빈을 왕비로 삼는 엄청난 일을 벌였다.

세 번째는 1694년에 일어난 갑술환국이다. 불과 5년을 못 넘긴 채 궁정과 전국에는 또 한 번 피바람이 몰아쳤다. 두 번의 환국을 통해 숙종은 절대권력을 차지했지만, 남인은 정국을 주도적으로 운영할 능력이 부족했다. 숙종이 무수리 출신인 최씨를 총애하며 숙원으로 승진시키자 장희빈은 심하게 질투했고, 남인들은 견제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느닷없이 장희빈의 오빠가 주동해 최씨의 독살을 시도했다는 고발이 들어왔다. 숙종은 기다렸다는 듯 영의정인 권대운 등 남인 세력들을 숙청하고, 왕비였던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킨 후 인현왕후를 중전으로 복귀시켰다. 이 무렵 조선은 위기와 혼란에 빠졌다. ‘을병 대기근’이라 불린 대기근이 1699년까지 계속되면서 전 인구의 20% 가까운 아사자들이 속출했다. 그 상황 속에서 인현왕후가 죽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 등은 장희빈과 일가들이 궁 안에 신당(神堂)을 세우고 주술로 왕후를 저주해 죽음을 유발했다고 고발했다. 숙종은 장희빈과 오빠인 장희재를 즉시 처형했고, 권력은 다시 서인의 차지가 됐다(정은임,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

숙종은 공납제도의 문제점과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가져온 대동법을 넓은 지역으로 확대했고, 대부분의 토지를 측량해 징수를 합리적으로 만들었다. 또한 상평통보를 주조해 농업사회인 조선에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뿐만 아니라 오군영 체제를 완성하는 등 군사 체제를 정비하고 북한산성을 축성했다. 강화도에 돈대들을 구축해서 군사기지로 만들었다. 또한 통신사를 자주 파견했고, 안용복의 도일 사건을 계기로 1696년에는 일본 막부에서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地界)임을 확인받아 왜인들이 울릉도에 출입하는 일을 막았다(김호동, 『안용복』).
숙종 때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인 무태돈대.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숙종 때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인 무태돈대.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이러한 정치적 업적이 있고, ‘환국’ 또한 막강한 신권에 대항해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불가피한 정책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궁중 여인들의 암투와 붕당정치를 왕권 강화에 이용했고, 장희빈의 소생인 경종, 숙빈 최씨의 소생인 영조가 왕이 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당쟁들을 야기했다. 또한 그것을 고질화시킨 계기를 마련한 것은 비판받아야 한다. 일본은 이러한 사례를 침소봉대해 ‘당파성’이론이라는 식민사관을 만들어 우리를 세뇌했고, 무책임한 대중문화인들은 흥밋거리로 확대재생산했다.

의문이 생긴다. 일본인이 강조하고, 우리의 자조처럼 여기는 ‘당파성’은 우리의 민족성일까?
역사에서 모든 국가는 피를 부르는 권력투쟁을 벌였고, 그로 인해 나라가 멸망한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일본은 백 년이 넘는 전국시대가 있었다. 조선의 당쟁은 몇 가지 특이한 점들이 있고, 지금까지도 잔영을 남기면서 한민족을 붕괴시키는 중이다. 회고하기조차 역겨운 당쟁을 현재와 후손들을 위해 살펴본다.

첫째, 조선의 정체를 이루는 두 기둥은 신분제인 양반 제도와 ‘이데올로기’ 수준인 성리학이다. 따라서 학자적 관료인 양반들은 한정된 관직(정치)과 토지(경제) 등과 관련된 권력을 둘러싸고 사상투쟁을 벌였다. 초기에는 성리학과 전통신앙·불교 등의 비성리학과 이념투쟁을 벌였고, 점차 성리학 내부의 갈등으로 비화돼 양명학·북학·실학 등으로 이어지는 노선투쟁을 멸망할 때까지 벌였다.

둘째는 외척의 권력 강화와 정치간섭이다. 왕권은 항상 신권에 위협당해 연산군이나 광해군, 사도세자처럼 탄핵 또는 반란 때문에 죽거나 귀양을 당했다. 그때문에 왕권은 때때로 외척을 방어막으로 이용했으나, 왕이 어려서 대비 등이 수렴청정을 할 때나 왕비나 여인들의 권력이 강해질 때는 외척세력에 왕권이 제약당했다. 또 신권은 외척과 비외척으로 구분돼 왕을 사이에 두고 심각하게 갈등을 벌였다. 다만 숙종 때는 장희빈의 낮은 신분과 여인들 간의 암투, 궁궐 내부의 특이한 사건들이 연루됐을 뿐이다.
숙종 때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인 무태돈대.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숙종 때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인 무태돈대.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셋째, 궁궐과 정부를 넘어 전국적으로 확산한 현상이었다. 지방에 파견된 고급관리는 중앙의 당파싸움과 직결됐다. 지방 세력들은 중앙정치에 발언권을 갖고 있었고, 집단 상소는 국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송시열의 예에서 보듯 출사할 수도 있었으며, ‘산림(山林)’으로 현재의 재야세력과 같이 중앙정치에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또한 양반 사대부들은 토지와 노비뿐만 아니라 권력 창출 및 예비 관료를 양성하는 서원과 향교에 대한 영향력을 강하게 미쳤다. 그 때문에 당쟁은 지방의 교육권 쟁탈전까지 겸할 정도였다. 거기에 조선은 혈연공동체 사회였으므로 중앙의 당쟁은 지방 당쟁을 거쳐 향촌 당쟁으로 비화했다. 씨족 간의 싸움 뿐만 아니라 집성촌에서조차 내부에서 피를 부르는 일들이 발생했다. 조선의 당쟁은 그 밖에도 소수사람들의 독점물인 ‘한문’이 가진 난이성, 추상성 등과 자의성으로 정확한 정책과 사상논쟁이 힘들었고, 외국과 교류가 봉쇄된 체제 속에서 비합리성과 교조성이 강한 탓으로 당쟁은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당파성은 문화 일부로 전승됐고, 일제 강점기에는 적에게 악용당했으며, 민족분단과 전쟁이라는 최악, 최대의 당쟁을 유발했다. 지금도 북한은 수시로 ‘환국’을 통해 왕조체제를 고수하고, 남쪽은 이념을 놓고 당쟁에 여념이 없다.

인류에게 발전 또는 진보란 결국 풍족한 생활과 더불어 자유로운 사고와 삶이다(윤명철, 『역사는 진보하는가』). 특히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이론과 행동이 생활을 좌우해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정치에서도 이데올로기가 강요돼서는 안되며, 소수집단이 대표성을 자처하면서 ‘준정치 행위’를 해서도 안된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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