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무용수에서 후배 가르치는 발레마스터로…안무가로도 활동
무대 떠나는 국립발레단 이영철 "타이츠 입은 20년, 행복했다"
남들보다 늦은 스무 살에 발레를 시작한 청년은 타이츠가 정말 싫었다.

발레리나는 포인트 슈즈와 튀튀, 형형색색의 의상이 있는데 발레리노는 민망한 '쫄쫄이'를 입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누가 몸을 훑어볼까 봐 조마조마했다.

고등학교 시절 가수 백댄서로 활동하다가 발레로 방향을 튼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이영철(43) 씨는 발레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억한다.

딱 붙는 타이츠를 입는 게 부끄러워 차라리 현대무용을 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랬던 청년은 불혹을 넘겨서도 발레에 푹 빠져 지냈다.

이제 무대에서 내려올 때가 됐다고 생각한 그는 다음 주부터 후배를 가르치는 '발레마스터'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안무가로도 본격적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무대 떠나는 국립발레단 이영철 "타이츠 입은 20년, 행복했다"
이씨는 지난 13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진행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나를 바꾸고 삶을 풍요롭게 해준 게 발레"라며 "타이츠를 입은 20년의 세월이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는 20년간 발레만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고 했다.

스무 살의 열정으로 달린 5년, 국립발레단을 대표하는 발레리노가 되기 위해 노력한 5년, 주인공으로서 자신만의 색깔을 지닌 무대를 만들기 위한 10년이었다.

이씨는 서른 중반이던 어느 날 강수진 단장으로부터 "서서히 준비해야 할 시기"라는 말과 함께 '발레마스터' 전환 권유를 받았다.

춤을 더 추고 싶다며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은퇴에 대한 고민은 시작됐다.

지난해 코로나19 상황에서 공연이 잇달아 취소되면서 감각이 떨어지는 걸 느꼈고, 후배들에게 길을 터줄 시기라는 것 등을 고려해 은퇴를 결정했다.

이씨는 "교수직 제안도 있었지만, 후배 단원들을 가르치는 건 지금이 아니면 못할 것 같아서 국립발레단에 남기로 했다"며 "마스터는 단원들보다 더 성실하고 많이 준비해야 하는 자리인 만큼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그를 포함하면 국립발레단에서 6명이 마스터로 활동한다.

마스터는 단원 지도가 가장 큰 업무인데 매일 리허설과 클래스 등을 진행한다.

단원들과 수시로 소통하며 좋은 무대를 올리고자 노력하는 자리다.

무대 떠나는 국립발레단 이영철 "타이츠 입은 20년, 행복했다"
이씨는 지난해 코로나19 사태로 은퇴 공연은 결국 하지 못하고 무대를 떠나게 됐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렌스 신부 역할이나 '호두까기 인형'의 주역인 왕자 역할로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무산됐다.

국립발레단은 대신 올해 여름 단원들의 안무작을 선보이는 'KNB 무브먼트 시리즈 6'에서 은퇴 공연 성격의 무대를 마련할 계획이다.

이씨가 그간 낸 안무작에 본인이 주역으로 출연하는 방식 등을 고려 중이다.

'빈집'(2015), '3.5'·'더 피아노'(2016), '미운오리새끼'(2017), '오만과 편견'(2018), '더 댄스 투 리버티'·'계절; 봄'(2019) 등 그의 작품들은 안무가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화려한 행사를 하고 멋진 말을 하고 떠나는 것만이 아름다운 마무리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며 "친한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그간의 스트레스도 풀면서 시간을 서서히 흘려보내는 게 진짜 은퇴"라고 강조했다.

무대 떠나는 국립발레단 이영철 "타이츠 입은 20년, 행복했다"
이씨가 은퇴를 준비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본 내용이 담긴 책 '발레리노 이야기'(플로어웍스)도 이달 말에 출간된다.

수석무용수가 된 스토리와 발레리노의 일상, 직업관, 후배들에게 전하는 당부 등을 담았다.

이씨는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고 존경받는 마스터가 되고 싶다고 했다.

클래식 발레 무대에 오르진 않겠지만 객원 형태로 외부 공연 무대에 오르고, 안무가로서 매년 좋은 작품 1편을 올리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2018년 한국무용 안무가인 장혜림(35) 씨와 결혼한 이씨는 지난해 10월 딸을 얻었다.

그는 "생명의 탄생이 가져다주는 진정한 행복과 기쁨이 무엇인지, 사랑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몸속 깊이 느끼고 있다"고 웃었다.

자신을 응원해준 관객들에 대한 인사도 잊지 않았다.

"무용수가 무대에 선다고 해서 관객들보다 높은 사람인 건 아니에요.

관객들이 지켜봐 주시기 때문에 저희가 존재할 수 있는 거죠. 따뜻한 무용수라고 불러주셔서 늘 감사했습니다.

더 깊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