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된 '섬'의 운명과 '그날'의 비밀
[영화 속 그곳] 내가 죽던 날

영화 '내가 죽던 날'은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아니 처음 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어폐가 있다.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던 날'이 현실 속에서 쓰이려면 주어로는 1인칭과 2인칭이 올 수 없다.

이 말에 배경 이야기가 생략됐다면, 두 가지의 추측이 가능하다.

'내'가 사후 세계라는 초월적 공간에서 하는 말일 수 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영화 속 그곳] 내가 죽던 날

◇ 절벽에서 실종된 소녀
태풍이 몰아치던 밤. 외딴섬 절벽 끝에서 여고생 세진(노정의 분)이 사라졌다.

책상에 유서로 보이는 글이 놓여있고, 절벽 근처에서 운동화가 발견됐다.

정황상 완벽한 자살이었지만, 거센 파도와 조류로 사체는 찾을 수 없다.

남편과의 이혼 소송 등 신변 문제로 휴직했던 형사 현수(김혜수 분)는 복직을 앞두고 상사의 지시에 따라 세진의 실종을 자살로 종결 짓기 위해 섬으로 향한다.

사체만 없을 뿐 자살로 결론짓는 일은 너무도 간단한 일이었지만, 세진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마을 주민 순천댁(이정은 분)을 만나고 세진의 행적을 추적하던 현수는 쉬운 결말 앞에서 머뭇거린다.

[영화 속 그곳] 내가 죽던 날

현수는 CCTV에 찍힌 세진의 얼굴과 표정을 보고 그 속에서 '삶의 의지'를 읽는다.

자살하려는 사람의 표정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현수는 아버지 회사의 부도와 비리로 집안이 몰락한 세진의 어려운 상황을 보고 궁지에 몰린 자신과 세진을 동일시한다.

세진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두 사람의 정신세계는 단 한 번의 만남, 한마디의 대화 없이도 이렇게 연결된다.

현수는 사건 처리 결과 기입란에 '자살 추정'이라고 써넣고는 이내 지워버린다.

현수는 결국 비밀에 다가간다.

그리고는 자신이 푼 수수께끼의 답을 확인하기 위해 복직도 포기하고 여행에 나선다.

[영화 속 그곳] 내가 죽던 날

◇ 섬은 고독을 피할 수 없을까
영화의 배경은 외딴섬이다.

촬영을 위해 3개의 섬을 돌았다.

박지완 감독은 섬을 배경으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섬에는 거기서 영원히 살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이웃이 어떤 사람인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도시는 계속 옮겨 다니면서 살지만 섬은 다르다는 것이다.

섬(Island)은 '격리'(Isolation)와 같은 어원을 가졌다.

이동하지 못하고 한 곳에 계속 살아야 하는 것은 삶의 '고립'이다.

고립된 개체는 '고독'을 피할 수 없고, 고독은 늘 '그리움'을 낳는다.

'섬'이라는 존재는 혼자일 수밖에 없는 인간 실존의 유비(類比)다.

[영화 속 그곳] 내가 죽던 날

그렇다면 섬의 운명은 늘 피할 수 없는 고독을 마주하는 것뿐일까.

섬과 섬 사이에는 바다가 있고, 바다는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침묵에 조심스럽게 귀 기울일 수 있다면, 우리는 침묵의 건너편에 또 다른 고립과 고독이 우리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알게 될지 모른다.

현수가 세진의 소리 없는 외침과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순천댁의 표정만으로 진실을 보게 되듯이 말이다.

영화는 고립과 고독,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고통이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연대의 힘으로 해소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영화 속 그곳] 내가 죽던 날

◇ 섬, 섬, 그리고 섬
영화 속 외로운 섬들에는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모든 것이 있다.

섬은 하나의 개체다.

고개를 돌리면 아득한 수평선과 금빛 너울을, 고개를 들면 거짓말 같은 구름이 있다.

하얀색 벽이 빛나는 집이 있고 만선의 기대를 품은 씩씩한 배도 여럿이다.

아늑한 숲과 우아한 곡선의 산등성이는 여기가 섬임을 잠시 잊게 해준다.

작은 배가 힘겹게 붙어 있는 선착장과 검게 그을린 주민들이 바쁘게 오가는 곳은 인천 자월도다.

인천에서 서남쪽으로 35㎞ 떨어져 있다.

한가운데 봉긋 솟아있는 국사봉(166m)을 봄날에 가면 벚나무들이 분홍 띠를 두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줏빛 달'이라는 뜻의 섬 이름답게 달빛마저 외로워 보일지 모르겠다.

세진이 살던 집은 충남 서산시 웅도에 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곰이 웅크리고 앉은 모습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영화 속 그곳] 내가 죽던 날

웅도는 육지에서 불과 700m 떨어져 있다.

포장길로 연결돼 있는데 하루 두 번 물이 빠질 때만 건너갈 수 있다.

이어졌다가 끊어졌다를 반복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 같다.

물이 빠졌을 때 드러나는 광활한 갯벌에 굴, 바지락, 낙지 등 수없이 많은 갯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수수께끼의 절벽과 숲이 있는 곳은 전남 신안군 증도다.

증도는 꽤 큰 섬이다.

국내 최대의 소금 생산지인 태평염전이 있다.

가을이 되면 갯벌의 함초와 칠면초가 붉게 물드는 '갯벌의 단풍'이 장관이다.

담양, 완도와 함께 아시아 첫 슬로시티로 지정되기도 했다.

우전이라는 이름의 해수욕장도 있는데, 이곳에선 90여 개의 무인도가 점점이 떠 있는 수평선을 하늘의 별 보듯 감상할 수 있다.

'내가 죽던 날'이라는 말이 지닌 비밀은 어느 섬에 가야 찾을 수 있을까.

[영화 속 그곳] 내가 죽던 날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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