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의 '백제 부활' 꿈이 남긴 유산

전라북도 익산은 공주, 부여, 경주와 함께 한국의 '4대 고도(古都)'다.

공주, 부여에 이은 백제의 왕도였다.

동아시아 최대 사찰과 석탑이었던 미륵사 터와 미륵사지 석탑, 왕궁리 유적은 왕도 익산의 위엄을 보여준다.

◇ 석조 문화재 보수의 새 장 연 미륵사지 석탑
[여기 어때] '백제왕도' 익산의 보석,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 유적
가을이 본격적으로 무르익던 즈음. 익산 미륵사지를 찾은 날은 파랗게 높은 하늘 아래, 벼가 누렇게 익은 황금 들녘을 맑고 투명한 햇살이 가득 내리쬐고 있었다.

동양 최대의 절터로 평가받는 미륵사지는 한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코스모스 길이 끝날 때쯤 모습을 드러냈다.

미륵산에 포근히 안겨 있는 미륵사지는 차라리 힐링 공간이었다.

사찰 건물은 오래전에 모두 사라지고 푸른 잔디 위에 서 있는 몇 개의 석조 유물만 늘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보였다.

그곳에 한국 문화재 보수의 새 장을 연 미륵사지 서쪽 석탑(이하 '미륵사지 석탑'으로 표기)이 있었다.

그리고 이 석탑 오른쪽에 실패한 문화재 복원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미륵사지 동쪽 석탑(이하 '동탑'으로 표기)이 있다.

미륵사지 석탑과 동탑은 처음에 모양과 높이가 같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쌍둥이 탑이다.

그러나 복원 및 보수의 개념과 방법이 달랐기 때문에, 복원과 보수가 끝난 지금 두 탑은 전혀 다른 모습과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고 불린다.

그만큼 석탑이 많다.

석탑 안에는 사리장엄구, 불경 등의 귀한 문화유산이 간직돼 있다.

석탑에서 나온 유물은 고대의 수수께끼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될 때가 많다.

이런 한국 석탑들의 시원이 바로 미륵사지 석탑이다.

그 전에 한국의 탑은 목탑이었다.

실제로 미륵사지 석탑 바로 옆에는 이 석탑보다 더 큰 목탑이 있었다.

목탑은 유실됐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그래서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의 양식,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하는 이행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 어때] '백제왕도' 익산의 보석,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 유적
미륵사는 백제 무왕(재위 600∼641) 대에 지어져 조선 시대인 1600년대까지 유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터의 규모가 확인된 사찰 중에서는 백제 최대, 나아가 동아시아 최대 사찰이었다.

미륵사지의 상징처럼 우뚝 솟은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자, 제일 큰 석탑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지난해 장장 20년에 걸친 보수 작업의 대장정을 마쳤다.

단일 문화재로는 수리 기간이 가장 길다.

그만큼 문화재 관리 당국과 학계는 미륵사지 석탑 보수에 공을 들였다.

석탑이 수리를 끝내고 준공된 뒤 미륵사지를 찾는 관람객은 이전의 연간 수만 명 수준에서 10만 명 이상으로 훌쩍 늘었다.

국민의 높은 관심과 애정을 느낄 수 있다.

문화재위원회가 1999년 구조 불안정을 이유로 해체, 수리를 결정했을 때 미륵사지 석탑은 콘크리트 덩어리에 방불했다.

일제가 1915년 이 석탑의 무너져내린 부분을 수리하면서 콘크리트를 덕지덕지 발랐기 때문이다.

해체 과정에서 제거한 콘크리트 양은 185t에 이른다.

그런데 이렇게 정성 들여 복구한 미륵사지 석탑은 보수하다가 만 듯한 느낌을 준다.

석탑 중 유실된 부분을 보수하지 않고, 없는 채로 그대로 뒀기 때문이다.

문화재 관리 당국과 학계는 미륵사지 석탑의 원형을 확인하지 못하자, 남아있는 부분 혹은 기록 등으로 확인된 부분만 복원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문화재의 원형이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형태를 추정해서 복원하거나 수리한 경우가 허다했다.

[여기 어때] '백제왕도' 익산의 보석,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 석탑 보수는 추정에 의하지 않고,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를 근거로, 현대의 온갖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이루어졌다.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원형대로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은 문화재로서 진정성, 역사성을 확보했다.

한국의 석조 문화재 복원 기술을 세계 수준으로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동탑은 1992년부터 1993년까지 2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에 복원됐다.

당시 동탑은 본래의 형체를 알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져내리고, 잔해조차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당국과 학계는 나름의 연구를 근거로, 탑의 높이와 모양을 추정했다.

그리고 추정을 근거로 동탑을 9층 탑으로 복원했다.

원래 석탑을 구성했던 돌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기계로 돌을 새로 깎아 탑을 쌓았다.

복원된 동탑은 원형을 회복한 문화재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물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았다.

'졸속 복원' 논란이 제기됐고, 동탑은 '성형미인', '죽은 탑'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만 했다.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와 동탑의 복원은 문화재 수리와 보존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조지연 익산시 문화관광해설사는 "동탑이 복원될 때만 해도 문화재 보수의 개념과 기술이 지금과 매우 달랐다"라며 현재의 잣대로 당시의 복원을 무조건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밝혔다.

당시의 지식과 기술로는 최선을 다한 복원이었다는 것이다.

미륵사지 석탑과 동탑은 국내 문화재 보존 역사와 가치관 변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오래 남을 것이다.

동탑을 외면할 게 아니라 변화하는 우리 인식의 일부이자 산물로 보듬는 애정을 갖는 게 옳을 듯싶다.

[여기 어때] '백제왕도' 익산의 보석,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 유적
해체 작업이 막바지에 달했던 2009년 1월 미륵사지 석탑에서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사리장엄구가 나왔다.

또 가로 15.5㎝, 세로 10.5㎝의 금판에 글자를 새긴 금제사리봉영기가 출토됐다.

여기에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시주해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이로써 미륵사와 석탑의 조성 주체와 연대가 확인됐다.

조 해설사는 "탑이 개보수되는 과정에서 사리가 옮겨지거나 분할되는 경우가 많고, 사리장엄과 봉영기가 원형 그대로 출토되는 사례는 세계적으로 드물다"며 "1천400년 전에 묻었던 타임캡슐이 열린 셈"이라고 강조했다.

사리장엄구는 국립익산박물관에 전시됐고, 사리는 미륵사지 석탑에 재봉안됐다.

올해 초 미륵사지 바로 옆에는 국립박물관으로는 전북에서 두 번째인 국립익산박물관이 개관했다.

미륵사지의 경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 건물의 높이를 낮춰 박물관과 미륵사지 유적이 조화를 이루게 했다.

익산박물관에 들어서면 미륵사지 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 중 사리내호가 1호 전시물로서 관람객을 맞이한다.

사리내호는 높이 5.9cm, 지름 2.6cm의 금 세공품이다.

사리를 담은 작은 유리병을 다시 넣는 소형 금속 항아리다.

90% 이상의 순도로, 황금빛을 발하는 사리내호의 정교한 아름다움 앞에서 관람객은 숨이 멎을 듯한 황홀감에 빠진다.

찬란했던 백제 예술혼의 세계로 인도되는 듯하다.

◇ 무왕의 '백제 부활' 꿈 서린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로 5㎞쯤 떨어진 왕궁리에는 또 하나의 큰 백제 유적지인 왕궁리 터가 있다.

백제 무왕이 왕궁을 지어 살았던 곳이다.

그의 사후에는 사찰로 운영됐다.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은 40여 년 재위하며 백제의 부활을 꿈꿨다.

그 부활은 그가 태어나 자랐던 익산을 무대로 펼쳐진다.

현재의 서울을 500년 가까이 도읍으로 삼았던 백제는 공주를 거쳐 부여로 천도했다가 무왕 때 익산에 왕궁을 지은 것으로 최근 여러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한 것인지, 익산에 별도(別都)를 만든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익산이 왕도인 것만은 분명해졌다.

격동기였던 7세기 한반도에서 무왕은 익산을 거점으로 백제 부흥의 야심을 펼쳤던 것으로 전문가들은 본다.

[여기 어때] '백제왕도' 익산의 보석,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 유적
현재 왕궁리 터에는 절제된 조형미로 유명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289호)을 제외하고는 왕궁 건물과 시설이 모두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있다.

거대한 왕궁터를 오층석탑이 홀로 지키고 있는 것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왕궁터를 향해 걸으면 늙은 벚나무 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을 이고 있는 5층 석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실감케 하는 또 하나의 장면이다.

왕궁리 터에는 오층석탑을 찬미한 시들이 적힌 표지판이 서 있다.

잔디밭에 떠오른 흰나비를
바라보는 네 눈빛은 오늘도 깔끄막이다
그늘 속인데도 날은 무덥고
뙤약볕을 지키고 서 있는
네 표정엔 바람 한 점 묻지 않았다

- 이병초 시인의 '나비의 꿈 왕궁리 오층석탑에서'의 일부

왕궁리 유적 조사는 1989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조사 결과 백제 왕궁으로는 처음으로 외곽 담장과 내부 구조가 확인됐다.

왕궁의 남측 절반은 의례, 정무를 위한 공간이었고 북측 절반은 휴식 공간인 정원과 후원으로 배치됐음이 드러났다.

북측 공간에는 당시로는 최고 귀중품이었던 금과 유리를 생산하던 공방이 있었다.

또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대형 화장실 유적이 있다.

이 화장실 유적은 상당히 과학적으로 설계돼 있었다.

화장실을 경사지에 만들고, 경사지 위에서 아래쪽으로 물이 흘러내리게 해 오물이 물을 따라 자연스럽게 강으로 흘러가게 했다.

일종의 수세식이다.

또 화장실 구덩이를 3m 이상으로 깊이 파고, 구덩이에 고인 물이 빠져나가는 배수로는 구덩이의 높은 곳에 위치시켰다.

현대 정화조 시설과 유사한 원리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는 근대에 만든 파리의 하수도를 과학적 구조라며 관광지로 만들어 자랑한다.

한국의 고대 정화조는 파리 하수도가 명함을 내밀 수조차 없을 정도로 훨씬 오래된 지혜임이 틀림없다.

왕궁리 터는 백제의 왕궁 축조 방식과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여기 어때] '백제왕도' 익산의 보석,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 유적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는 백제역사유적지구로서, 유네스코에 의해 2015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두 유적 외에 공주의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 부여의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나성, 능산리고분군 등 8개 유적으로 구성된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한국, 중국, 일본 등 고대 동아시아 국가들의 상호 교류 역사를 보여주고 백제의 내세관, 종교, 건축기술, 예술미를 확인시키는 특별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 백제의 숨결이 살아있는 '고백도시' 익산
익산이 경주, 공주, 부여와 어깨를 겨루는 '4대 고도(古都)'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네 곳은 2004년 한국의 4대 고도로 지정됐다.

익산은 왕궁(왕궁리 유적), 사찰(미륵사지, 제석사지), 산성(미륵산성, 익산토성), 왕릉(무왕릉) 등 고대 왕국이 갖춰야 할 4가지를 모두 가진 2천년 고도다.

또 익산은 공주, 부여와 함께 백제 후기의 왕도였다.

익산은 2천년 전 시간의 문을 여는 열쇠를 간직한 장소임을 널리 알리기 위해 '고백도시'를 자처한다.

이는 고도 백제(古都百濟)를 줄인 말인 동시에 '가자! 백제' 'GO 100(번)'을 의미한다.

'사랑, 진심을 고백하는 익산'이라는 뜻도 있다.

우리가 방문한 날 미륵사지 연못가 잔디밭에는 누군가 홀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미륵사지와 왕궁리 터에는 시민들의 '야행'(夜行)을 위해 해가 지면 은은한 조명등이 켜진다.

품격 높은 박물관, 정성스럽게 가꾼 유적지만큼 데이트하거나 사랑을 고백하기 좋은 장소가 없다.

인파가 붐비지 않고 고즈넉하다.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공간은 다툼과 미움을 허락하지 않는다.

문화재, 예술 작품, 역사 등 얘깃거리가 널려 있어 대화의 문이 끝없이 열린다.

익산에 가보자. 무왕의 숨결을 느껴보자.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1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