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해 본 적 있나요?"
“현수와 상황은 달랐지만 내 이야기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운명처럼 끌린 이 작품에서 제가 카메라 앞에서 얼마나 솔직할 수 있었느냐가 관건이었죠.”

김혜수(50·사진)는 오는 12일 개봉하는 영화 ‘내가 죽던 날’(감독 박지완)에 출연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그는 삶의 벼랑 끝에 선 형사 현수 역을 맡아 유서 한 장을 남기고 외딴섬에서 사라진 소녀의 행적을 추적한다.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김혜수를 만났다.

“너무 좋은 시나리오였지만 투자를 받기는 쉽지 않았어요. 희망을 얘기하지만 과정이 어둡고 아프며 지난하게 느껴지니까요. 투자자 입장에선 어떻게 보면 용기가 필요한 작품인 거죠. 우리끼리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게 있었어요. 이 영화를 반드시 해내자, 제대로 해내자 그게 최종, 최대 목표였습니다.”

극 중 현수는 남편의 불륜으로 이혼소송을 해야 하는 와중에 팔 마비를 겪는 등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그가 행적을 추적하는 소녀는 범죄자인 아버지 때문에 외딴섬에 유배돼 살았다.

“가장 사랑하고 신뢰했던 대상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이 살아온 현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처참한 상황에 놓인 현수는 결국 나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이기도 했어요.”

김혜수는 현수와 소녀의 삶을 응시하는 순간 실제 ‘어머니의 빚투’에 몰려 절망했던 경험에 괴로웠다고 털어놨다.

“아무리 밝은 사람도 해맑은 인생만 살지는 않아요. 저 역시 고통과 슬픔을 피하지 못했고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야만 했고요. 절망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은 없었어요.”

영화가 김혜수에게 위로를 줬다. “‘네가 너를 구해야지’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라는 대사에 감정이 울컥했어요. 정말 나에게 필요한 말이었어요.”

영화는 절망 속의 소녀에게, 삶의 벼랑 끝에 몰린 현수에게 각각 희망의 빛을 던져주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소녀를 구원하는 순천댁(이정은 분)은 주제를 대변하는 캐릭터다.

“고통이란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고, 그때는 안 보여도 곁에 있는 사람이 위안을 주기도 해요. 관객들도 영화를 보며 이런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어느덧 오십 줄에 들어선 그는 한국 상업영화를 이끌고 있는 대표 여배우다. ‘국가부도의 날’ ‘타짜’ ‘도둑들’ ‘차이나타운’ ‘굿바이 싱글’뿐만 아니라 드라마 ‘하이에나’ ‘시그널’ ‘직장의 신’ 등 작품마다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연기력과 흥행력을 인정받은 그다.

“쉰 살이 됐다고 달라질 건 없어요. 어떤 것들에 영향과 감흥을 받느냐가 중요해요. 남들은 제가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이라고들 말하지만, 사실 연기할 땐 자신감이 없어요. 직선적인 성격이 다예요. 당당하게 보이는 것과 당당한 것과는 다르죠. ”

그렇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 ‘워너비’ 배우가 됐다.

“한 배우가 김혜수 때문에 출연했다고 하는 말에 감사하고 놀랐어요. 하지만 저는 스스로 도달하지 못했다는 마음이 있어요.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공동의 목표로 만나 제대로 일하는 겁니다.”

유재혁 대중문화전문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