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건설 현장 최초로 국내 의료진이 파견된 이라크 카르발라에서 건설 근로자들이 원유정제시설과 부대 설비를 짓고 있다.  현대건설·서울성모병원 제공
해외 건설 현장 최초로 국내 의료진이 파견된 이라크 카르발라에서 건설 근로자들이 원유정제시설과 부대 설비를 짓고 있다. 현대건설·서울성모병원 제공
20일 새벽 1시 이동건 서울성모병원 감염관리실장과 강재진 신경외과 중환자실 간호사는 이라크 나자프 공항으로 떠나는 카타르항공 비행기에 올랐다. 이들의 목적지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서쪽으로 110㎞ 떨어진 카르발라에 있는 현대건설 정유공장 건설현장이다. 이슬람교 시아파 성지인 이곳까지 방탄차량으로 이동해야 할 정도로 험난한 여정이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불안에 떠는 한국 근로자들을 위해 흔쾌히 출장을 자원했다.

이 실장은 서울성모병원의 감염 상황을 책임지는 사령탑이다. 코로나19가 언제 병원으로 퍼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지만 김용식 서울성모병원장은 그의 결정에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 김 원장은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도 사람을 구하기 위해 가는 것이 의료인의 숙명이자 소명”이라고 했다.

해외 건설 현장 찾은 첫 의료진

'코로나 패닉' 현대건설 이라크 현장에 감염병 사령탑 보낸 서울성모병원
현대건설과 서울성모병원은 코로나19 상황에 해외 현장 근로자 건강을 챙기기 위해 의료진을 파견했다. 국내 건설사가 의료진 파견을 성사시킨 것도, 의료진이 해외 건설 현장을 찾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은 7박8일 일정 동안 현지 직원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한국과 이라크 간 원격 협진 시스템도 구축할 계획이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올해 7월 기준 한국인 해외 건설근로자는 92개 나라에 9354명이 근무하고 있다. 이들 중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사람은 13개 나라에서 195명에 이른다. 5명은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대다수 주재원이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건설 현장은 그럴 수 없었다. 몇 년의 공사기한이 정해진 현장 특성상 현지 발주처에서 공사 중단을 결정하지 않으면 임의로 인력을 철수하기 어려워서다. 인력난 등으로 공사가 지연돼 떠안는 손해배상금도 건설사에는 큰 부담이다. 해외 건설현장이 코로나19 사각지대로 꼽히는 이유다.

국내 건설사가 진출한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아랍에미리트(UAE) 등에 코로나19가 퍼지면서 한국인 직원의 건강까지 위협받는 상황이 됐다.

원격 협진 통해 104명 무료 진료

현대건설이 서울성모병원에 도움을 요청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현대건설은 올해 6월 해외 파견 직원의 원격 건강상담을 요청했다. 서울 성모병원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7월부터 코로나19 환자를 위한 정식 원격진료센터를 가동했다. 의료 인공지능(AI) 기업 퍼즐에이아이는 플랫폼을 제공했다.
서울성모병원 의료진이 이라크 건설 현장 주재원과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원격 건강상담을 하고 있다  현대건설·서울성모병원 제공
서울성모병원 의료진이 이라크 건설 현장 주재원과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원격 건강상담을 하고 있다 현대건설·서울성모병원 제공
지금까지 서울성모병원 화상상담을 한 현대건설 해외 주재원은 104명이다. 이라크, 필리핀 등에 있는 직원이 하루 10명 정도 신청해 원격상담을 했다. 시차를 고려해 밤에도 상담창을 열었다. 원격진료를 한 뒤 대가를 받을 수 없는 의료법에 따라 진료비는 무료다.

김 원장은 “코로나19 감염 증상으로 미각이 사라져 크게 걱정하던 해외 주재 직원과의 상담에서 10일 후면 증상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더니 건강 상태도 좋아졌다”며 “감염내과 의사가 감염 관련 교육을 하고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직접 상담해 반응이 좋다”고 했다.

아무도 나서지 않던 현장 진료

화상상담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라크 지역에 확진자가 폭증했다. 건설현장에서도 확진자가 속출했다. 정부가 급히 마련한 1·2차 전세기를 이용해 7월 한국으로 들어온 이라크 건설근로자는 365명이다. 이들 중 확진자는 101명에 이른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국토교통부까지 나서 해외 파견 의료진을 구했지만 선뜻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치안 상황이 좋지 않은 데다 국내 코로나19에 대응하느라 해외까지 돌볼 여력이 있는 병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성모병원은 다시 팔을 걷어붙였다. 이 실장과 함께 떠난 강 간호사는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고 출장을 자원했다. 이들은 이라크 현장 직원을 진료하고 건강관리설명회도 열 계획이다. 이라크 현장에 있는 클리닉 세 곳에는 현지 의료진 17명이 근무한다. 이들과 협진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현대건설은 포터블 엑스레이도 준비했다. 사용법을 교육한 뒤 현지에서 보낸 영상을 한국에 있는 의사가 확인할 계획이다.

해외 주재원의 화상진료를 위해 감염내과, 정신과는 물론 정형외과 등 의사만 30명 정도 참여했다. 앞으로 소아과, 만성질환 등으로도 확대할 계획이다.

“우리 병원에서만 매년 50억원 정도를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고 해외에서 온 환자를 무료로 치료하고 있어요. 우리 국민이 타지에서 힘들어하는데 이를 외면할 순 없죠. 모든 의료인이 같은 마음일 겁니다.” 김 원장의 말이다.

이지현/심은지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