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우리는 조직폭력배 아니면 흉악범이나 인신매매범인가요?"
한국에 정착한 지 10년이 넘는 중국동포 김모(49) 씨는 얼마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웹툰을 보고 씁쓸해 했다.

주인공이 자신의 가족을 납치한 중국동포 출신 악당에게 복수하는 내용의 웹툰인데, 하나같이 잔인하고 거친 캐릭터로 묘사됐기 때문이다.

"웹툰 중국동포는 흉악범 아니면 조폭…혐오 여전"
김 씨는 25일 연합뉴스에 "허구라고 명시하긴 했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순수한 창작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악화된 시선에 기름을 붓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영화에서 유행처럼 일부 계층을 위험한 조직으로 그렸던 게 벌써 10년 전이다"며 "언제까지 악당 역할로 나올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중국동포를 조직폭력배로, 이들이 사는 지역을 범죄 소굴로 묘사한 영화 '청년경찰'에 법원이 개봉 3년여만인 6월 사과와 재발방지를 약속하라는 결정을 내렸지만 여전히 일부 대중문화 콘텐츠에서는 외국인 혐오와 편견을 조장하는 내용이 보인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젊은 연령대가 즐겨보고 해외에서도 인기 콘텐츠로 자리잡고 있는 웹툰의 경우, 다문화 국가로 접어들고 있는 우리나라 상황에 발맞춰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극 중 악당을 이방인 출신으로 설정하는 장면은 만화 속에서 종종 발견된다.

한 유명 웹툰 사이트에서 토요일에 연재 중인 인기 웹툰의 경우, 조선족 출신 캐릭터는 주인공을 해치는 폭력조직원으로 그려진다.

이들이 중개인에게 요청해 중국에서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15세 미만도 열람이 가능한 액션 웹툰에서도 이들은 잔혹한 싸움꾼으로 그려진다.

당사자들은 씁쓸하다는 입장이다.


2017년 10월 '청년경찰' 제작사 측에 민사소송을 주도했던 김용필(51) 중국동포신문 대표는 "대중매체에서 조선족과 중국동포를 잔혹한 범죄자로 묘사해 온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라면서도 "유행처럼 자리잡은 악순환을 끊고자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결국 정식으로 사과 판결도 받아냈지만 그 이후로도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해당 웹툰을 본 중국동포 A씨도 "서울 대림동이나 차이나타운에 살고 중국어 억양을 쓰는 악인이 등장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며 "독자는 이것이 일부가 아닌 전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 5월 학술지 '사회과학연구'에 실린 '일상 속 이주민 목격과 대중매체의 이주민 재현이 다문화 수용성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대중매체에서 선량한 이미지의 이주민을 자주 접할 경우 다문화 수용성이 높았지만, 불법체류자나 범죄자와 같이 불안정하고 위협적인 이주민을 자주 접했을 때 수용성은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성학 중국동포연합중앙회 총회장은 "대중문화 특성상 주목을 받고 많이 소비돼야 하는 현실은 이해한다"며 "자극적인 묘사는 결국 동포와 내국인 간 갈등만 심화시킬 거라 본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창작의 자유는 존중해야 하지만 소수자가 피해를 보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특정 계층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대중매체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고 덧붙였다.

미국의 '인성과 사회심리학 저널(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연구에 따르면 르완다 주민을 대상으로 특정 종교와 부족의 문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계속 들려준 결과, 청취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 간에 인식 차이가 벌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학연구소는 '한국의 제노포비아 발현 및 대책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 이런 결과를 인용해 "외국인과 결혼이주여성 등을 지나치게 폭력적인 범죄자로 묘사하는 콘텐츠를 문화적 차별행위로 보고 적절한 제재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웹툰 중국동포는 흉악범 아니면 조폭…혐오 여전"
반면 이용자의 인식 개선이 먼저라는 분석도 나온다.

김연수 대중문화평론가(전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는 "예술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과 같다"며 "이 같은 작품이 꾸준히 나온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차별적인 시선이 남아있다는 방증"이라고 분석했다.

단순히 창작자만을 비판할 순 없다는 의미다.

그는 "대중의 공감을 자양분으로 생존하는 대중매체 특성을 감안한다면 이용자도 반성할 부분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런 논란이 이어지자 한 유명 웹툰 사이트 관계자는 "사회의 더 다양한 시각을 담는 방향으로 가이드라인 강화를 논의 중이며 조만간 공개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