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향로 작가가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 전시된 ‘:)♥atypical’ 연작 앞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윤향로 작가가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 전시된 ‘:)♥atypical’ 연작 앞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전시장에 들어서면 캔버스들이 점층법을 이루며 벽에 띠처럼 둘러져 있다. 세로 18㎝, 가로 14㎝의 0호 크기부터 50호(116.8×91㎝)까지 점점 커지는 61개의 캔버스가 마치 하나의 작품 같다. 캔버스들은 저마다 하나의 작품이면서 전체로서도 작품인 셈. 캔버스에는 인쇄체 영문들과 낙서처럼 휘갈긴 획들이 뒤섞여 있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윤향로 작가(34)의 개인전 ‘캔버스들’이다.

홍익대 회화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전문사 과정을 졸업한 윤 작가는 동시대 이미지 생산과 소비의 기술적 측면에 주목하며 미술 이외의 다양한 분야에서 참조한 요소를 회화로 변주해왔다. “회화는 세계에 대한 스크린샷”이라고 주장하는 그는 대중문화, 미술사, 패션산업 등 여러 분야에서 끌어온 이미지를 변형해 인쇄하거나 캔버스 위에 그린다. 작가 스스로 명명한 ‘유사회화’다.

그는 이번 전시에 미술사의 선배 작가들을 소환했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여성 화가 헬렌 프랑켄탈러(1928~2011)의 활동을 정리한 카탈로그 레조네(전작도록)에서 프랑켄탈러가 이전 시기의 회화를 참조해 작업한 사례를 발췌했다. 타인이 참조한 것을 다시 참조하는 일종의 재인용 내지 재전유다.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선보이는 신작들은 프랑켄탈러의 도록 일부를 컴퓨터로 스캔한 후 캔버스에 디지털 프린팅으로 인쇄한 것이다. 작품에는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베첼리오 티치아노, 19세기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와 클로드 모네의 그림 이미지 및 이름 등이 등장한다. ‘painting’ ‘canvas’ 등 회화와 관련된 단어, ‘She’ ‘her’ 등 여성 인칭 대명사도 나온다.

티치아노는 색채와 붓자국이 살아 있는 16세기 회화를 정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후 서양 회화의 기본 매체가 되는 ‘캔버스에 유화 기법’을 개척한 인물. 미술사 최초의 모더니즘 운동인 리얼리즘의 대표 주자인 쿠르베는 모던 아트의 원조다. 모네는 인상파 양식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그의 작품 ‘인상, 일출’에서 ‘인상주의’라는 말이 생겨났다.

지난해 결혼과 출산을 경험한 윤 작가는 이런 미술사 선배들의 흔적에 자신의 현재 삶을 더해 일종의 얼굴 없는 자화상을 그렸다고 한다. 출력된 도록 이미지 위에 스프레이와 에어브러시로 물감을 분사해 또 하나의 층을 만들었다. 그 위에는 오일바(Oil Bar)로 즉흥적인 획을 추가했다.

미술사의 큰 변곡점을 이룬 선배 작가를 통해 여성으로서 또는 작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반추하고 투영한 작품이다. 그는 “30대 중반이라는 나이는 화가에게 변화의 시기인데, 결혼과 출산을 겪으면서 현실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고 이런 내 모습을 반영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자신이 입었던 웨딩드레스 주름을 추상적으로 화면에 담고, 아이가 크레파스나 색연필로 그린 낙서를 오일 바로 재현한 드로잉을 세 번째 층에 얹은 것은 이런 까닭이다.

작품의 제작 과정도 특이하다. 학고재갤러리 본관의 내벽 전체를 감싸는 ‘디지털 매핑 이미지’를 만든 다음 여기서 원하는 크기의 이미지 조각들을 오려내 실제 캔버스 천에 출력했다. 캔버스 규격 및 표준 화면비(16 대 9)를 기준으로 17종의 판형으로 100여 개 조각을 골라 전시장의 해당 위치에 설치했다. 가상 공간의 캔버스를 실제 공간으로 옮겨온 것이다. 전시장 맨 안쪽에는 90×160㎝ 크기의 18개 작품이 하나의 작품처럼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몇몇 캔버스에서 푸른빛으로 출력된 부분은 캔버스들 간의 구조와 연결성을 보여주는 장치다. 매핑 작업 때 프로그램 특성상 서로 다른 벽면에 같은 이미지가 생기는 공통분모 영역을 푸른색 반투명 막으로 형상화했다.

작품 제목은 암호명을 연상케 한다. 자화상을 표현하는 이모티콘, 설치된 벽면을 나타내는 도형, 캔버스 규격을 나타내는 호수의 조합이다. ‘:)◆10F-3’이라는 제목은 ◆으로 표시된 벽면에 걸린 ‘10F’ 규격의 캔버스 중 세 번째 작품이란 뜻이다. 윤 작가는 “작품들을 제각각 다른 사람이 소장하게 되더라도 원래 전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9월 27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