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 '심판', '순응하는 현대인'을 유쾌하게 비틀다
폐암 수술 도중 죽음을 맞은 판사 아나톨 피숑은 천국에 도착해 지난 삶을 ‘심판’받는다. 생전에 좋은 학생, 좋은 시민, 좋은 남편, 좋은 직업인으로 살았다고 자부하는 피숑. 기대하지 않았던 대목에서 칭송받거나, 생각지도 못했던 ‘중대 범죄 혐의’가 드러나기도 한다. ‘천상 판사’의 최종 판결로 그는 천국에 남아 있을 수도, 다시 태어나야 하는 형벌을 받을 수도 있다.

《심판》(열린책들)은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두 번째 희곡이다. 2015년 《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원제로 프랑스에서 출간돼 4만 부 넘게 팔렸다.

희곡은 총 3막으로 구성됐다. 1막에선 피숑이 스스로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천국에서 변호사, 검사, 판사를 만나며 죽음을 깨닫는 장면을 담았다. 2막은 주인공의 지난 생을 돌이켜보고, 3막은 다음 생을 결정하는 절차로 이어진다.

판사로 일하며 선과 악을 가려내는 위치에 있었던 피숑은 죽자마자 심판대에 선다. 수많은 선행을 베풀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자 애썼지만 ‘천상 검사’는 그가 젊은 시절 천생연분을 몰라봤고, 연극배우라는 길을 버리고 판사라는 직업을 택하며 재능을 낭비했다며 ‘환생의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죽음과 심판, 환생이란 묵직한 주제를 갖고 있음에도 시종일관 유쾌하다. 자신의 생애가 이리저리 비틀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피숑은 죽어서도 생전의 결혼반지에 집착하고, 상속세를 받아야 한다며 지상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환생을 앞두고는 “삶이 두렵다”거나 다음 생엔 ‘농담을 잘 써먹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한다.

희곡은 속도감 있는 전개로 소설처럼 읽힌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한 채 순응주의에 빠져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살려는 현대인의 모습에 유쾌한 경종을 울린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