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고려의 삼별초

무신정권의 사병집단으로 출발한 삼별초
몽골에 강경한 항전파로 발전
제주까지 옮겨간 끝에 여몽연합군에 패망
일본 오키나와 중부 소재 우라소에성. '계유(癸酉)'명이 있는 고려기와 발견.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일본 오키나와 중부 소재 우라소에성. '계유(癸酉)'명이 있는 고려기와 발견.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3년간 여몽연합군과 대결한 삼별초의 항쟁은 평가하는데 고민이 필요한 사건이다. 과거 가치관, 정치적인 성격, 신분, 심지어는 나라 간에도 다른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고려는 강화라는 섬으로 피신해 당시 세계 최강의 국가인 몽골에 38년간 저항했다. 섬이라는 전술적인 이점도 작용했지만, 세계전략과 국제전이란 군사작전의 특성을 이해한 무신정권의 판단력이 성공한 결과다. 하지만 국제질서는 변했고, 정복전쟁을 완료한 몽골 제국은 남송이라는 최후의 강적을 향해 동쪽에 군사력을 집중했다. 몽골의 협박과 회유는 100년간 권력을 무신들에 뺏긴 채 반전의 기회를 노리던 왕족과 귀족들을 돌아서게 했다. 또한 오랜 전쟁의 피해로 염전 분위기가 팽배했고, 강도정부에 대한 불신과 정부의 필요성이 혼재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고려는 찬·반 논의를 거쳐 1270년 5월에 강화도를 떠나 개경으로 환도하기로 했다. 반대파들은 격렬하게 저항을 시작했고, 해산 명령에 불복한 삼별초를 중심으로 난(저항)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진도 정부 1년, 제주정부 2년, 도합 3년간 여몽연합군과 대결하다 1273년 2월에 패망, 우리 역사에 굵은 마음의 상처를 남긴 채 사라졌다.
사병집단으로 시작한 삼별초
강화도에 있는 고려고종의 무덤.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강화도에 있는 고려고종의 무덤.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사병집단으로 출발했다. ‘야별초(夜別抄)’라는 첫 이름에서 보듯 ‘도둑잡기’라는 사회적 기능을 표방했으나 최씨 무신정권의 권력을 확대 재생산하는 정치적인 기능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규모가 커지고, 군사력이 강해지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분리됐다. 이후 강도정부에서 몽골에 포로가 됐다가 돌아온 사람들로 구성된 신의군(神義軍)이 합세해 삼별초라는 이름으로 재편됐다. 이들은 무신정권과 이해관계가 깊었고, 실제로 권력의 향방에 큰 역할을 한 군사집단이다. 몽골에 강경했던 항전파인 그들은 배중손과 노영희 등을 주축으로 승화후인 온(溫)을 임금으로 추대한 후에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 전면전에 돌입했다. 전력은 열세였지만 수군능력이 뛰어나고 해양의 메커니즘을 잘 파악한 그들은 승부수를 던졌다. 해상의 섬들을 거점으로 해군력을 이용해 연안지역들을 관리하면서, 해전을 벌이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삼별초군이 불확실한 미래에 운명을 걸고 비장한 결심을 한 채 강도정부를 떠나는 광경을 《고려사절요》는 이렇게 기록했다. “배를 모아 공사(公私)의 재물과 자녀들을 모두 태우고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구포(仇浦)로부터 항파강(缸破江)까지 뱃머리와 꼬리가 서로 접해 무려 1000여 척이나 됐다.”
삼별초의 진도 정부와 전투
자의와 타의로 강화를 탈출한 수천 명의 사람들은 서해안을 내려가면서 동참하는 세력들과 합류하면서 서해의 다도해와 남해의 다도해가 만나는 절묘한 위치의 큰 섬인 진도의 고군면 연동마을에 상륙했다. 적당히 넓어 다수의 주민이 농사지을 만한 터전이 있고, 육지와 가까워 반몽세력 및 농민들과 연합해 육전도 벌일 수도 있는 지역이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모여진 세곡을 실은 조운선이 개경으로 가는 길목이므로 경제적으로도 유리했다. 이 곳은 훗날 해양전술의 천재인 이순신이 13척의 배로 왜선 133척을 궤멸시킨 ‘울돌목(鳴梁)’이 있는 해양방어전의 요충지이다.

삼별초는 용장산성을 쌓고 궁궐을 지었다. 정부의 명분으로 해군력을 활용해 전라도 해안의 나주같은 항구도시와 곡창들을 공격하고, 세력권 아래에 뒀다. 또한 전략적으로 가치가 풍부하며 국제적으로 활동하기에 적합한 제주도를 점령했다. 이렇게 해서 진도, 완도, 흑산도, 해안의 큰 섬들, 그리고 제주도를 잇는 해양왕국을 완성했다. 일부 사료를 보면 반몽골적인 정서를 가진 일부 백성들의 호응을 받았고, 일본에는 '고려첩장불심조조'라는 국서를 보내 공동대응을 모색할 정도였다. (윤명철, 《한민족 해양활동 이야기 2』)

이에 고려와 몽골의 전쟁은 삼별초 정부와 개경정부, 연장된 무신정권과 왕족 및 문신정권, 자주적인 반원정책과 실용적인 친원정책 간의 내부 전쟁으로 변화했다. 원나라는 고려의 분열을 활용, 왕족들과 고려 출신의 홍다구가 지휘하는 고려인들을 참여시킨 여몽연합군을 편성해 400척의 병선으로 공격했다. 대규모의 상륙작전으로 용장산성이 함락 당하자 온왕(溫王)은 홍다구 부대의 추격을 받아 아들과 함께 사살됐다. 실질적인 권력자인 배중손도 남도포에서 전사했다. 진도정권은 1년만인 1271년 5월에 붕괴했고, 탈출한 일부 세력들은 김통정을 필두로 제주도에 상륙했다.
제주도 정부와의 전쟁
제주 항파두리성벽.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제주 항파두리성벽.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제주도는 토지가 부족해서 식량을 자급자족하기에 불충분했고, 군수물품들을 자체에서 생산할 환경이 안됐다. 반면에 육지와 거리가 멀어 정부의 예봉을 피할 수 있고,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해양력을 갖춘다면 일본 남송 유구(오키나와) 등과 교류와 무역을 하면서 자립하고, 해군력을 강화해 해양왕국을 건설할 만한 곳이었다. 마치 에게해의 크레타섬이나 이탈리아 반도 아래의 시칠리섬 같은 위상이었다. 이러한 이점들을 간파하고 이미 1270년에 점령했던 삼별초군은 신속하게 ‘환해(環海)장성’이라는 긴 해안 방어체제를 구축하고, 북제주군의 애월읍에는 궁궐과 관청 역할을 한 항파두리성을 쌓았다.

이 무렵 원나라는 남송 공격전에서 고전하는 과정이어서 고려 내부에 관심을 덜 기울였다. 고려 정부 또한 삼별초와 정면대결을 할 능력은 부족했다. 따라서 삼별초군은 조운 등 해양적 시스템과 해군력을 최대한 활용해 전라도와 남해안을 공격했다. 개경으로 항행하는 조운선을 탈취해 개경정부를 압박했다. 또한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의 해안을 공격했고, 개경을 위협할 정도였다. 이어 경상도도 공격했고, 마산과 거제를 습격해 일본국을 정벌할 목적으로 건조 중인 군선들을 불태워버렸다. 그러자 제주도를 남송공격에 활용하는 전략을 가진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은 고려 정부에 삼별초를 진압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한 고려와 원은 총 병력 1만2000명, 군선 160척으로 여몽연합군을 편성해 1273년 4월 9일에 영산강 하구를 출항했다. 대선단은 추자도를 거쳐 제주도의 곳곳으로 상륙작전을 전개해 삼별초군과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결국 1273년 4월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 군대는 항파두리성을 점령했고, 김통정은 도피했다가 자살했다. 당시 1300명이 포로로 잡힌 것으로 기록됐다. 이로써 40년에 걸친 대몽항쟁은 끝났다. 탈출한 일부 세력들은 일본, 남송, 그리고 오키나와 지역 등에서 또 다른 디아스포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윤용혁,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
삼별초에 대한 후대의 평가
제주항파두리성단면,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제주항파두리성단면,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장렬했지만 결과적으로 무모했던 삼별초의 행위는 고려인의 삶과 우리 역사에 각각 어떻게 작동했을까? 세계질서의 재편과정에서 몽골제국을 상대로 벌인 전면전은 현실을 무시한 행위였고, 참혹한 결말로 끝났다. 그러나 그 시대의 주체세력들과 일부 백성들에게는 삼별초의 행위는 분명히 소중하고 고귀한 항쟁이었다. 또 그들의 자유의지와 희생은 오랫동안 외세의 그늘이 드리워졌던 후대의 우리 민족에게 무엇보다도 값진 유산을 선사했다. 이에 ‘난(亂)’으로 평가됐다가 언제부터인가 ‘항쟁’ 심지어는 ‘혁명’이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하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농토와 살림, 이중 정부의 조세징집, 전투력 징집 등으로 생활과 생존이 파괴되는 백성들의 처지 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삼별초 항쟁으로 ‘6.25 전쟁’처럼 전후에 만연했을 가치관의 충돌, 세력들의 분열, 제주도·진도 등 피해지역을 중심으로 만연한 지역 갈등 등 민족력을 소모시킨 현실도 인식해야 한다. 또한 원나라의 장악력이 더욱 강해지고, 일본공격이라는 명분없는 전쟁에 국력을 쏟아붓고, 여몽연합군으로 편성돼 엄청난 인적손실이 발생한 계기를 마련한 사실도 부인할 수는 없다.

역사도 개인의 삶처럼 정의와 불의, 선과 악처럼 명확하게 구분하고, 거기에 따라 상벌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면 우리 역사는 현재보다는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됐을까? 역사에서는 일부 시대나 일부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할 수도 있고,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거시적인 명분과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전제로 당시대 사람들의 삶과 행복을 유보하거나 양보할 수는 없다. 더더욱 생존을 담보로 하는 일은 죄악이다. (윤명철, 《역사는 진보하는가》)

삼별초. 우리 역사에서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고 사건이지만, 잊을 수 없는 과거이고, 더더욱 잊어서도 안 되는 미래이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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