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47기 현존 제주 대표 상징물
"마을의 악한 기운을 막고 소원을 이뤄주는 수호신"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물 하면 많은 사람이 '돌하르방'을 떠올린다.

[줌in제주] 제주 돌하르방의 비밀…"독자성 띤 문화 교류 산물"
툭 튀어나온 부리부리한 눈에 넓적한 주먹코, 꾹 다문 입을 하고 벙거지를 쓴 모습은 범접할 수 없는 근엄함을 풍기면서도 묘한 친근감마저 준다.

이처럼 친숙해 보이는 돌하르방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 돌하르방은 원래 이름이 아니었다
'돌하르방'은 '하르방'(할아버지)이란 제주 방언에 '돌'이라는 낱말이 앞에 붙여진 단어로, '돌로 만들어진 할아버지'라는 뜻이다.

해방 이후 어린이들 사이에 '돌하르방'이라 불리다가 1971년 제주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면서 '돌하르방'이란 명칭이 공식화됐다.

그러나 원래 이름은 아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 석상을 '벅수머리', '우석목(偶石木)', '옹중석(翁仲石)'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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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제주 사람들은 돌하르방을 마을의 악한 기운을 막고 소원을 이뤄주는 수호신이라 생각했다.

할머니들은 돌하르방을 보면 두 손을 모아 합장했고, 공손히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마을에 질병이 번지지 않은 것도, 숱한 난리가 일어났을 때 피해를 보지 않은 것도 모두 다 돌하르방 덕분이라 믿는 사람도 있었다.

아기를 갖지 못한 여인들이 돌하르방의 코를 쪼아서 돌가루를 물에 타 먹곤 했기 때문에 일부 돌하르방의 경우 코가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돌하르방은 조선시대 당시 제주의 행정구역인 제주목·대정현·정의현 등 1목 2현의 성문 밖 입구에 모두 48기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모두 제주에서 흔한 현무암으로 만들어졌는데, 1목 2현 중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모양과 크기에 공통점과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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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만 비교하면 제주목 돌하르방의 평균 신장은 181.6㎝로 가장 크고, 정의현 돌하르방은 141.4㎝, 대정현 돌하르방은 136.2㎝다.

제주목의 돌하르방이 당당한 자세를 취하고 있어 더 위용 있고 예술성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48기 중 돌하르방 1기는 사라져 현재 제주목 23기, 대정현 12기, 정의현 12기 등 47기만 남아있다.

제주목의 돌하르방 2기는 서울 경복궁 내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옮겨져 제주에는 45기만 남아 있다.

제주에 남아 있는 돌하르방은 사람들의 무관심과 도시 발달과정에서 무단으로 옮겨지면서 원래 위치가 아닌 관공서와 공항, 학교, 관광지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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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하르방의 기원 논쟁
아직까지 돌하르방의 기원에 대한 정설은 없다.

그동안 한국 학계에서는 제주 돌하르방의 기원에 대해 몽골(1206∼1368년)의 한반도 지배와 관련됐다는 '북방설'과 남미, 동남아 일대에서 유사한 석인상(石人像)들이 발견된다는 점에 착안한 '남방설', 조선시대 때 자체적으로 세웠다는 '자생설' 등이 제기됐었다.

그 중에서도 몽골에서 기원했다는 북방설이 학자들 사이에 좀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존하는 돌하르방의 조성시기를 추적해보면, 대정현·정의현·제주목 순으로 돌하르방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정현과 정의현 돌하르방은 각 현성(縣城)의 축성시기인 15세기 초, 제주목의 돌하르방은 관덕정이 건설된 시기인 18세기 중반이다.

문제는 제주도 내에서 고대로부터 석인상을 조각했던 전통이 없던 상황에서 돌하르방이 갑자기 등장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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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학자들은 돌하르방이 제주에 등장하게 된 배경을 외부에서 찾았다.

제주목의 돌하르방은 18세기 조선에서 유행한 석장승과 조형적 영향관계가 있는 것으로 밝혀져 자생설을 뒷받침하는 듯 하지만, 이보다 앞서 조성된 대정현과 정의현 돌하르방의 기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맹점이 있다.

또 적도 해류와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남미와 동남아 지역의 석조 문화가 전파됐다는 남방설 역시 의문을 제기하는 시선이 많다.

북방설은 13∼14세기 몽골 초원에 조성된 '훈촐로' 석인상의 모습이 놀랍게도 돌하르방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기인하고 있다.

몽골의 한반도 지배 시기에 닿아있어 15세기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대정현과 정의현 돌하르방의 기원을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다 지난 2014년 10월 제주 돌하르방과 생김새가 매우 흡사한 중국 요(遼)나라(907~1125년) 시대 석인상(石人像)이 만주에서 발견돼 돌하르방의 기원과 관련해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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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실하 한국항공대 인문자연학부 교수는 당시 "제주 돌하르방이 몽골을 통해 왔다고 할지라도 그 외형은 최소한 요대부터 시작됐고 요대 석인상의 외형이 몽골시대로 이어져 몽골 지배기에 제주까지 전해졌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성권 단국대 교수는 2015년 '제주도 돌하르방의 기원과 전개'란 논문을 통해 돌하르방의 기원을 북방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돌궐계 석인상과 몽골풍이 혼합돼 나타났다"는 주장을 폈다.

정 교수는 "제주도 돌하르방은 유라시아 대륙에 기원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도 자체의 독자성이 잘 나타나 있는 대표적인 문화 교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돌하르방은 제주에서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으로서의 새로운 성격을 부여받았고, 18세기 들어와서는 한반도 남단의 석장승 문화의 영향으로 더 준수하고 잘생긴 제주읍성 돌하르방으로 발전하는 등 진화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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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민·관광객들의 돌하르방 사랑
돌하르방은 이러한 기원 논쟁과 상관없이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여겨진다.

제주의 대표 상징물에 대해 조사를 하면 도민 또는 관광객들은 돌하르방을 1순위로 떠올리곤 했다.

돌하르방이 제주도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제주 관광지에선 너나 할 것 없이 돌하르방 기념품을 만들었고, 관광객들은 어김없이 돌하르방 기념품을 구입해 돌아갔다.

1984년 제주에서 열린 1만1천500여명이 참가한 전국소년체전 당시 토산품으로 지정한 제주의 50종 131개 품목 중 돌하르방 기념품 1만여 개가 팔렸다.

대부분의 참가자가 돌하르방 기념품을 구매한 셈이다.

당시 제작자에 따라 멋대로 기념품이 제작되는 문제가 발생하자 1987년에는 제주도에서 제주시 삼성혈 입구 동쪽에 세워진 돌하르방과 KBS 제주방송국 정문,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 남문, 대정읍 인성리의 돌하르방 등 4기를 표준형으로 정해 공예품·기념상품·광고·전시물 등의 제작 기준으로 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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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런 기준에 상관없이 다양한 형태의 돌하르방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외에도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등 중요한 손님이 제주를 찾을 때마다 돌하르방이 선물로 전달됐다.

돌하르방 특허를 둘러싼 논란으로 제주도 전체가 발칵 뒤집힌 적도 있었다.

1993년 인천의 한 업자가 돌하르방 모습을 상표로 특허청에 등록, 독점권을 행사하는 바람에 수십년 전부터 돌하르방 형상을 이용해 토산품을 만들고 석재 가공업을 해 온 사람들이 당장 일을 그만둬야 할 상황까지 놓이기도 했다.

논란은 제주도와 도의회 차원에서 국무총리에 돌하르방 상표등록 취소를 건의하는 등 사회문제로 불거지자 업자가 스스로 등록 취소를 하면서 일단락됐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