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한 여성 캐릭터…"대중영화로서 달라진 시대 반영하는 건 당연"

연상호 감독이 '부산행'의 대재앙 이후 폐허가 된 '포스트 아포칼립스'(대재앙 이후)를 그린 영화 '반도'로 돌아왔다.

내달리는 좀비가 어떻게 진화했을까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조금은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연 감독은 애초 좀비가 크리쳐(생명이 있는 존재)로 그려지는 건 원치 않았다고 했다.

'반도' 연상호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인간성 보여주는 우화"
10일 만난 연 감독은 "어릴 적 좋아했던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들은 대재앙의 시대에 인간성을 보여주는 우화로서 기능했다.

그 영화들이 준 충격이 있었고, 그걸 즐겼다"며 "인간성을 노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장르다 보니 역설적으로 휴머니즘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반도'의 인물들도 전형적인 영웅 대신 평범하고 시시한 사람들이다.

간신히 살아남은 인간을 노리개 삼는 631 부대원들조차 악인으로 규정하기보다는, 멸망한 세상의 한 풍경을 이룰 뿐이라고 감독은 설명했다.

'부산행'의 재난에서 4년이 지난 뒤의 일이라는 설정상의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지만 연 감독은 '부산행 2'가 아니라 '반도'라는 독자적인 영화라고 강조했다.

그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다룬 영화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 먼저였다"며 "'부산행' 후속작에 대한 기대가 있다 보니 좀비 영화를 통해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 이뤄진 기획이었다"고 덧붙였다.

'부산행'과 비교를 피할 수는 없기에 짚는다면, 훨씬 커진 스케일과 비주얼에 더해 여성 캐릭터의 변화가 눈에 띈다.

'부산행'에서 일방적으로 남성의 보호를 받았던 여성들은 '반도'에는 없다.

가장 공을 들인 카체이싱 장면에서 운전대를 잡은 건 두 아이의 엄마인 민정(이정현 분)과 어린 여자아이인 준이(이레 분)다.

'반도' 연상호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인간성 보여주는 우화"
폐허에 고립돼 살아남은 631 부대원들은 이성을 잃고 짐승이 되어버렸지만, 그곳에서 탈출한 민정은 두 아이, 김 노인(권해효 분)과 함께 꾸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희생하고, 실행하며, 흔들리지 않고, 결단을 내린다.

연 감독은 "'반도'를 구상하며 처음 떠올린 이미지가 덤프트럭 같은 커다란 차를 아이가 몰고 다니는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 변화에는 '부산행' 이후 딸을 얻어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모습을 보고 있는 감독 개인의 신상 변화와 사회·문화적으로 거대한 물결을 이룬 페미니즘이라는 사회적 변화가 모두 반영됐다.

연 감독은 "대중 영화는 기획하는 순간부터 대중영화여야 한다.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면 대중 영화로서의 매력이 떨어진다"며 "'부산행'과 '반도'가 만들어진 시대는 완전히 다르고, 그런 시대를 반영한 것도 당연하다"고 말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그렇게 작은 아이가 세상에 적응해 가는 모습이 너무 놀라웠어요.

아이라는 존재는 회복력도 빠르고 생각보다 강하더라고요.

아이는 어떤 상황에 있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고, 아이가 어울리지 않는 이런 세상에 살면 대비가 될 거라고 생각했죠."
'반도' 연상호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인간성 보여주는 우화"
전직 군인으로, 영웅처럼 멋있게 등장한 정석(강동원 분)이 준이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앉아 '퍼덕퍼덕대는' 장면을 이야기할 때마다 연 감독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이런 종류의 장르 영화, 대중 영화에서 스토리 라인에 획기적인 변화를 주는 건 쉽지 않다"며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는 일종의 트위스트를 주는 걸 고민했다"고 말했다.

연 감독은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해 실사 영화와 드라마, 웹툰, 만화책까지 다양한 플랫폼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최근 최규석 작가와 함께 작업한 웹툰 '지옥'을 책으로 출간한 데 이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제작 중이고, 극본을 쓴 tvN 드라마 '방법'의 시즌 2는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연 감독은 "연출할 때는 너무 닳고 닳게 많이 봐서 최종 결과물을 봤을 때 감흥이 없는데, 극본을 쓴 드라마는 보는 재미가 있더라"며 웃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