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조 규모 세계시장서 일본 화지에 도전장…국제 '다크호스' 급부상
한지 활용 산업 분야로 확장…전주시, 인력 양성·인프라 구축 박차
[천년의 마법, 한지] ③ 전통을 넘어 '산업화 꽃' 피운다(끝)
"출·퇴근 때 늘 눈인사를 하는 친구들이죠."
김승수 전주시장 집무실 한켠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나무'들이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다.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것들은 바로 전통 한지의 원자재인 닥나무다.

껍질이 벗겨진 채 속살을 드러내 재질이 반질반질하고 색깔이 뽀얗다.

닥나무 속대 수십 개가 이처럼 김 시장 집무실 한쪽에 자리잡은 건 지난해부터다.

어른 키보다 큰 닥나무들은 전주시의 '한지 산업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전통의 멋은 물론 실용성과 고품질을 자랑하는 한지의 산업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세계 미술품 복원시장의 98%는 일본의 화지(和紙)가 점유, 사실상 시장을 석권했다.

전 세계 예술품 복원 등에 사용되는 전통 종이의 시장 규모는 4조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한지가 이 거대 시장에 '다크호스'로 떠오른 것은 불과 몇 해 전이다.

'동양의 대표적 전통 종이'로 인식되던 일본의 화지가 내구성과 복원성에서 단점을 드러냈다.

굳게 믿었던 화지가 변형되기 시작하자 유럽의 기록문화 복원 시장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생명력과 어떤 형태의 기록물도 재생해 내는 복원력을 가진 천연 종이는 없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때마침 전주 한지는 지난 2017년 신성 로마제국 황제인 막시밀리안 2세(1527∼1576) 책상의 부서진 손잡이를 완벽하게 복원, 세계 시장에 이름을 들이밀었다.

'세계 기록문화의 상징'이라 할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한지는 9세기 코란을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독일이 로스차일드가(家)로부터 약탈한 기도서 등 로스차일드 컬렉션, 20세기에 반출된 조선 시대 김홍도의 8폭 풍속도 병풍 복원 재료로 선정됐다.

일본 화지의 세계 시장에 균열이 생기면서 한지는 그 자리를 대신 꿰찼다.

전주시는 이를 기폭제로 삼았다.

'전통과 보존'이라는 범주에 갇혀 있는 한지를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육성, 세계 시장에 도전장을 던지기로 한 것이다.

지구촌 구석구석 스며들기 위해서는 한지 재료인 닥나무의 안정적 생산, 제조 인력과 시설, 유통 체계 구축 등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특히 지소(紙所)가 산재했던 전주권에는 국내 제조업체 28곳 중 25%인 7개가 명맥을 잇고 있어 그 가능성은 열려 있었다.

지소는 고려ㆍ조선 시대에, 지장(紙匠)이 모여 살며 나라에 공물로 바치는 종이를 만들던 구역을 일컫는다.

하지만 닥나무 생산량 감소로 전체의 80% 가량을 태국과 중국, 베트남 등지로부터 수입에 의존해 제조업체들이 애로를 겪고 있었다.

공급을 늘리려 해도 닥나무가 부족했다.

생산해도 판매가 안 되니 농민들이 닥나무 재배를 시나브로 외면한 때문이다.

이에 농산물을 정부나 지자체가 일정 가격에 사들이는 것처럼 전주시는 이례적이고 과감하게 닥나무 수매제를 도입했다.

2017년부터 우아동·중인동의 6개 농가를 독려해 1만8천여㎡에 1만2천주의 닥나무를 심었고, 지난해 20t의 닥나무 줄기를 수확했다.

시장 집무실에 있는 그 닥나무가 전주시의 첫 수매품들이다.

껍질을 벗겨 찌는 과정을 거치면 4t 가량의 흑피(검은색 껍질)가 생산되는데, 이는 A4 용지 기준 48만장을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시는 이를 수매해 전통 한지 제조업체에 시중가보다 저렴하게 제공, 국산 닥나무 원료 수급난 해소에 도움을 줬다.

[천년의 마법, 한지] ③ 전통을 넘어 '산업화 꽃' 피운다(끝)
전통적 재료와 방식으로 최상품 한지를 제조하기 위해 곧바로 '전통 한지 생산시설'도 착공했다.

국내 최초의 집적화된 전통 한지 생산시설이 탄생하는 것이다.

전주 흑석골 일대(서서학동)에 올 연말 완공되는 이 시설은 국비 23억여원 등 모두 83억원이 투입됐다.

1천216㎡(약 368평) 부지에 2층 규모로 제조 공간, 체험·전수 공간, 전시·역사·문화 공간 등을 갖춘다.

흑석골은 풍부하고 좋은 수질로 예로부터 지소가 집단화했던 곳으로 '한지골'로도 불렸다.

이 시설이 완공되면 전주 한지의 우수성을 그대로 재현한 고품질의 한지를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시는 기대하고 있다.

농민에게 안정적 판로를 확보해주는 동시에 제조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시는 세계 시장이 한지에 매료돼 그 사용량을 늘리는 추세에도 정작 국내에서는 창호 문풍지나 닥종이 인형, 부채를 만드는 재료 정도로 인식된 쓰임새의 외연 확장에도 팔을 걷어부쳤다.

[천년의 마법, 한지] ③ 전통을 넘어 '산업화 꽃' 피운다(끝)
최근의 소비 흐름을 반영, 개인의 취향이 중시되는 다품종 소량 생산과 핸드메이드 제품으로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전통 한지를 이용한 아트지와 고급 편지지, 포장용지로 변신은 이색적 전주 한지 수공예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

이는 연간 1천만명의 내·외국인이 찾는 전주 한옥마을 관광객들에게 인기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

또 환경문제 대안으로 자연 친화적이고 웰빙과 직결된 기능성을 강조한 친환경 한지사 섬유를 활용한 양말, 내의, 정장, 골프웨어, 침구류 등으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항균 기능을 활용한 기저귀, 반창고 등과 뛰어난 흡음성과 밀도를 이용해 스피커 기능을 포함한 한지 스크린 등은 세계가 주목하는 한지 응용상품들이다.

시는 기록문화 복원뿐 아니라 각 산업 분야에서도 한지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결과 종교계, 은행권, 대학교, 교육청, 기업체 등과 '전주 한지 보존과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통해 손을 맞잡았다.

전북 지역 4대 종단(기독교, 불교, 천주교, 원불교)은 주요 문헌 복본 시 전주 한지를 사용하고 각종 증서와 문서, 서적 제작 등 적극적으로 한지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

신협중앙회는 전국 900여개 신협과 내부 시장(쇼핑몰)을 활용해 한지 판매 기반을 조성했으며, 전북은행도 지난해 발간한 '전북은행 50년사'를 전주 한지로 만들고 임명장과 상장 등 업무 및 각종 행사에 한지를 활용하는 등 판로 확대에 동반자가 됐다.

전주교육지원청도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를 한지로 만들고, 병원들도 한지로 수의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취약계층 집 고쳐주기 사업을 하면서 한지로 만든 벽지와 장판을 구매하는 등 한지의 쓰임새가 빠르게 다변화하고 있다.

[천년의 마법, 한지] ③ 전통을 넘어 '산업화 꽃' 피운다(끝)
송정하 전주시 한문화 팀장은 "닥나무 생산과 한지 제조 기반을 착실히 다지면서 맥이 끊기지 않도록 장인과 후계자 지원을 강화하고 한지 제품의 쓰임새를 넓힌다면 국내 시장은 물론 기록문화 복원 등 세계시장에서도 한지의 약진은 두드러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승수 전주시장도 "'내일을 위한 과거의 종이'인 전주 한지의 탁월한 보존성과 복원력이 전 세계로 알려지면서 전주를 상징하는 브랜드가 됐다"면서 "(전주 한지가) 세계 지류 시장의 대표 파워브랜드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원형 보존은 물론 안정적 생산 시스템과 치밀한 유통 전략 등을 통해 산업화의 꽃을 피우겠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