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재갤러리 '그림과 말 2020' 전
'현실과 발언' 창립 40년…세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투명한 상자 안에 그을음이 묻은 듯한 유리병과 파편 같은 철 조각들이 놓였다.

네 개의 받침대는 색도 다르고 휘어서 반듯하지 않다.

1980년대 후반 시위에서 날아다니던 화염병과 학생들이 든 쇠파이프로 만든 신경호의 '꽃불 - 역천(逆天)(1992)이다.

꽃불은 당시 화염병을 가리키던 은어다.

임옥상의 '신문-땅굴 1~6'(1978)은 제3땅굴 발견을 보도한 신문을 재료로 만들었다.

신문 콜라주 위에 성에 낀 듯 뿌연 막을 씌워 군부독재 시절 국민의 눈을 가리려 한 정부, 진실을 찾으려는 국민들의 노력을 표현했다고 작가는 설명했다.

최근 전시에서는 흔치 않은 강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 100여점이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갤러리 전관을 채웠다.

1일 개막한 '그림과 말 2020' 전은 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의 중심이었던 '현실과 발언' 동인들의 작품을 소개한다.

1980년 창립한 현실과 발언은 엄혹했던 시절 적극적으로 현실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

1990년 해체했지만, 작가들은 각자 자리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올해는 현실과 발언 창립 40주년이다.

전시에는 강요배, 김건희, 김정헌, 노원희, 민정기, 박불똥, 박재동, 성완경, 손장섭, 신경호, 심정수, 안규철, 이태호, 임옥상, 정동석, 주재환 등 동인 16명이 참여했다.

1980년대 피 끓는 청년예술가들이 이제 60대 중반부터 80세를 눈앞에 둔 장년, 노년 작가가 됐다.

이번 전시는 동인들이 1982년 덕수미술관에서 개최한 '행복의 모습' 전 당시 발간한 회지 '그림과 말'을 돌아보며 만들었다.

당시 이들은 '화가는 현실을 외면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붙잡고 토론하고 연대하면서 '현실의 공기를 견딜 수 있는 그림'을 지향했다.

'현실과 발언' 창립 40년…세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회화, 판화, 설치, 사진 등 106점에서 작가들의 청년기 작품과 최근작을 비교할 수 있다.

시대도 정권도 바뀌었지만 이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회 모순과 부조리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다.

김정헌은 버려진 폐공장을 배경으로 자라는 큰 나무를 그린 '갈등을 넘어 녹색으로'(2019) 등 회화 작품을 출품했다.

1982년작 '행복을 찾아서'에는 한 노인이 건강과 행복한 미래를 위해 달리는 모습을 담았다.

심정수의 '응시'(1984)는 시위 도중 경찰을 피해 숨은 청년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조각이다.

2017년작 '새가 있는 풍경'은 날아가는 새와 노 젓는 사람이 하나의 원을 이룬 세계를 시적으로 표현했다.

작품에는 진보 성향 민중미술가들의 이념적, 정치적 색채도 드러난다.

시사만화가 박재동은 '바이러스'(2020) 연작에서 방송인 김어준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을 그려 검찰·언론개혁, 대북전단 살포 등을 소재로 삼기도 했다.

반면에 임옥상의 '흙'(2018)은 대지를 닮은 배경 위에 먹선을 힘차게 그은 추상적 작업이다.

안규철의 '약속의 색'(2020)은 역대 대통령 선거 벽보에 쓰인 색으로 화면을 메운 색면 작품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안규철은 "현실과 발언의 정신 중에 중요한 것은 각자 발언하는 방법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라며 "다양성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라고 말했다.

임옥상은 "결국 작품은 자신을 찾아가는 도정"이라며 "어떤 방식으로 발언을 드러낼 것인지가 여전히 숙제"라고 덧붙였다.

전시는 7월 31일까지.
'현실과 발언' 창립 40년…세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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