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드 글로서먼 '피크 재팬: 마지막 정점을 찍은 일본' 번역 출간

우리에게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외국인 일본을 관찰하다 보면 이 나라에서는 숱한 문제가 도돌이표를 찍은 것처럼 되풀이되는데도 좀처럼 변화와 개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을 갖게 될 때가 있다.

일본 다마(多摩)대학교 룰형성전략연구소(CRS) 부소장이자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퍼시픽포럼 선임고문인 브래드 글로서먼이 쓴 '피크 재팬: 마지막 정점을 찍은 일본'(김영사)은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나가는 책이다.

1991년 마이니치신문 기자로 처음 일본에 체류한 이래 30년 가까이 일본을 연구해온 저자는 아베 신조(安倍眞三) 총리 정부의 시기 일본 국력이 최정점에 달했고, 구조적·태도적 제약이 결합해 일본이 현재와 미래의 도전에 적응할 능력이 한계에 직면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자와 연구원으로서 일본에서 살면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과의 인터뷰, 대화와 축적된 자료, 공식 통계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내린 결론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개항을 요구했던 사건부터 제국주의적 팽창과 패전을 거쳐 잿더미 속에서 국가 재건에 성공했으나 거품 붕괴로 '잃어버린 10년(들)'을 겪고 간신히 어느 정도 활기를 되찾게 된 최근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간략히 돌아본다.

지난 150여년 동안 숱한 부침을 겪고서도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던 일본에는 최근 10여 년 사이 개혁의 도화선이 되기에 충분한 쇼크가 한꺼번에 몰아닥친다.

"내리막길 들어선 일본…그러나 나쁜 것만은 아니다"

첫 번째는 2008년 '리먼 사태'에서 시작된 세계 금융위기의 충격이다.

그다음은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개혁을 시도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가 총리에서 물러난 뒤 구태의연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자민당이 선거에서 참패하고 정권을 내준 사건이다.

또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열도를 둘러싸고 중국과 벌인 분쟁은 일본이 아시아의 리더이자 맏형으로 자임했던 현실 인식에 균열을 가져왔다.

마지막으로 2011년 3월 11일 닥친 동일본 대지진은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 이외에도 일본 국민의 심리적 상처와 정부에 대한 불신이라는 극복하기 어려운 후유증을 남겼다.

"내리막길 들어선 일본…그러나 나쁜 것만은 아니다"

'4대 충격'의 결과 '팽창'과 '재탄생'을 구호로 내건 아베가 정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아베노믹스를 통해 장기불황을 해소하고 정치적으로는 중국과의 관계 재조정과 한국에 대한 견제를 통해 강력한 일본을 재건하려는 아베의 행보는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아베의 목표는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연쇄 충격을 겪고서도 일본을 옥죄는 구조적·태도적 한계는 여전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저자가 보기에 더욱 치명적인 것은 태도적 측면이다.

일본인은 개혁이 시급하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자신들의 신념 체계 때문에 골치 아픈 현상 유지에 집착하면서 변화를 거부한다.

위험을 회피하고 국가가 돌봐줄 것이므로 스스로 챙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더욱 심해 젊은 노동자의 파업 성향은 지난 10년 만에 가장 낮아졌다.

책에 인용된 37세의 한 젊은이는 오늘날 청년 세대는 성장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들은 다운사이징과 불황만 경험해 봤을 뿐이다.

그래서 일본에서 꿈이 오그라들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전통도 일본을 바꾸는 데 강력한 걸림돌이 된다.

한 기업인은 저자에게 "우리가 더욱 분개하고 화를 냈더라면 3월 11일의 재난(동일본 대지진)이 변화를 위한 동력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이런 경향을 두고 방위성 산하 연구소의 연구원 두 명은 각각 '정상화에 대한 일본인의 편견', '정치적 무관심과 작은 행복의 선순환'이라고 불렀지만, 결과는 똑같다.

일본인은 불편을 감수하면서 살아갈 각오가 돼 있다는 것이다.

그 불편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징조일지라도.
물론 일본이 당장 쇠망의 길에 접어들었다거나 일본인들의 삶이 궁핍에 빠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서서히 침식돼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큰 변화에서 오는 불확실성보다는 당장 누리고 있는 안락함을 선호한다는 것이 오늘의 일본인들이라면 일본이 정점을 찍은 시기는 바로 지금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저자는 "몇몇 사람들은 일본의 지평이 줄어든다는 사실에 움찔하겠지만, 이런 변화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가 새로운 일본의 구체적인 비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내세운 것은 일본의 대(對)아시아 관계다.

기러기들이 비행할 때처럼 일본이 리더로서 앞장서고 다른 아시아국가들이 뒤따른다는 '안행(雁行)형태' 이론은 한국, 대만, 중국이 많은 산업 분야에서 일본을 이미 앞지른 오늘날에는 '철 지난 옛노래'에 불과하다.

저자가 만난 상당수 일본의 식자들도 이에 동조한다.

아사히 신문 논설위원을 지낸 한 인사는 "우리는 이제 부유해지지 않지만, 그게 나쁘지는 않다 일본은 조용한 사회다.

이는 일본에 대한 이미지 가운데 하나이며, 현재의 추세가 지속한다면, 이 이미지가 팽배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NHK의 평론가는 이를 더 간결하게 표현했다.

"우리는 우리의 예전 목표가 달성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

"
이 책의 원서는 지난해 봄에 출간됐기 때문에 지난 1년여 동안의 최신 상황은 반영되지 않았다.

그러나 근본적인 흐름에는 달라진 것이 없다.

저자는 지난 5월 27일 쓴 한국어판 서문에서 코로나 19 사태에 대한 미숙한 대처, 경제 침체, 내년에도 개최될 보장이 없는 도쿄 올림픽, 불신에 빠진 미국의 안보 공약 등을 들면서 "이 책에서 파악한 성향과 방향성은 계속 악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일부 한국인은 일본의 어려움을 고소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한국인들은 이 책을 경고의 메시지로 읽어야 할 것"이라고 충고한다.

김성훈 옮김. 428쪽. 1만9천800원.
"내리막길 들어선 일본…그러나 나쁜 것만은 아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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