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우리 역사에서 오국시대를 이룬 부여국

고구려·신라·백제에 가야·부여 더한 오국시대
900년 가까이 존속한 부여
많은 국가들이 부여 계승 주장
부여의 서쪽과 접촉지대였던 요서지역의 건조한 지대.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부여의 서쪽과 접촉지대였던 요서지역의 건조한 지대.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우리는 고대를 ‘삼국 시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가야를 포함하면 ‘사국 시대’이고, 거기에 부여까지 더하면 ‘오국 시대’가 된다.

‘부여’는 한국 고대사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와 성격을 갖고 있는 나라다. 원조선을 빼놓고는 가장 먼저 국가로 등장했고, 무려 900년 가까이 존속했다. ’북부여‘ ’동부여‘ ’홀본부여(고구려)‘ ’갈사부여‘ ’또 다른 동부여‘ ’남부여(백제)‘ ’부여말갈‘, 발해에 흡수된 ’두막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름으로 탄생하고, 부활했다.

부여를 계승한 나라들

부여처럼 역사상이 복잡한 고대국가를 이해하려면 만주지역의 지형, 기후, 생태계 등을 고려하고, 부족과 종족, 국민, 민족의 차이점, 그리고 독특한 행정시스템도 알아야 한다. 우선 부여를 표방하거나 계승한 나라들을 살펴보자.

첫째, ‘북부여’이다.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태왕비의 첫 머리에는 추모(주몽)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물신인 하백의 따님이라고 새겼다. 또 직전에 만들어진 모두루총의 묘지석에는 추모성왕이 원래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썼으며, 그밖에 여러 기록들이 해모수를 북부여 천제라고 했다.
광개토태왕비문 1면 첫행에 새긴 추모(주몽)가 북부여천제의 아들이라는 문장.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광개토태왕비문 1면 첫행에 새긴 추모(주몽)가 북부여천제의 아들이라는 문장.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둘째, ‘제 1 동부여’이다. 부여의 왕 해부루는 동쪽으로 이전하고 국명을 동부여라고 변경했다. 아들인 금와왕은 해모수의 부인인 유화부인을 궁으로 데려왔고, 알에서 태어난 주몽은 성장하면서 대소 등 왕자들과 갈등을 일으켜 탈출했다. (동)부여는 285년에 선비족에게 수도가 점령되면서 왕은 자살을 하고, 백성들 1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또 346년에는 선비족이 세운 전연의 공격을 받아 임금을 비롯해서 5만 여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이어 광개토태왕의 공격으로 병합됐다가 494년에 문자왕에게 항복했다.

셋째, ‘홀본부여’이다. 《삼국사기》에는 ‘졸본(卒本)’으로 표기했지만, 광개토태왕의 비문에 새겨졌듯이 ‘홀본(忽本)’이 정확하다. ‘미추홀(인천)’ ‘술이홀(파주)’ ‘오열홀(요동성)’ ‘안촌홀(안시성)’ 등과 동일하게 ‘홀’은 ‘골’ ‘마을’ ‘나라’를 뜻하는 부여계 말이다. 그러므로 홀본은 ‘홀’의 근본, 즉 원(原)부여일 가능성이 크다. 주몽은 소서노 등 연씨 세력이 장악한 홀본부여를 토대로 고구려를 건국했으므로, 《위서》 등에는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다.’고 기록됐다. 2대 유리왕부터 5대 모본왕까지는 왕의 성이 부여계인 ‘해모수’ ‘해부루’와 동일하게 ‘해(解)’씨였는데, 해는 ‘태양’을 의미한다.

삼국시대가 아닌 오국시대…부여국의 존재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넷째, ‘갈사부여’다. 부여는 왕위에 오른 대소가 주몽에게 패배하면서 위기에 직면했고, 왕자들의 탈출이 이어졌다. 동생 하나가 압록강 줄기인 갈사수가에 갈사부여를 잠시 동안 세웠으나 이내 고구려에 합병됐다.

다섯째, 제 2동부여이다. 부여가 285년에 선비족에게 수도가 점령됐을 때, 왕족 등과 주민들은 두만강 하구와 연해주 일대인 북옥저 땅으로 피난 갔다. 그런데 일부는 환국하지 않은 채 정착해 ‘동부여’라는 이름으로 존속했는데, 410년에 이르러 광개토태왕에게 정복당했다.
여섯째, 남부여이다. 백제는 홀본부여에서 내려온 소서노와 비류·온조 집단이 한강 하구에 세운 나라이다. 처음부터 동명사당을 세우는 등 부여정통론을 표방했으며, 개로왕은 북위에 보낸 국서에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出)고 했다. 538년에 성왕은 백제의 중흥을 목표로 수도를 부여로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라고 개명했다.

일곱째, 가설이지만 ‘왜부여’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부여계의 기마집단이 남진해서 일본 고대국가의 중핵을 이루었다고 주장도 있다.(존 코벨, 《부여기마족과 왜》) 유사한 주장들이 있었지만 에가미 나미오의 ‘기마민족 정복국가설’은 한·일 사학계에 대단한 충격을 줬다. 기마군단과 기마전의 능력을 갖춘 부여계의 천손족이 4C 전반에 한반도 남부를 출발해 일본열도의 선주민들을 정복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큐슈와 임나를 지배하는 왜·한 연합왕국‘은 4C말에서 5C초에 고구려에 대항하는 세력이라는 숨은 논리가 있다. 여덟째, 북부여의 후예들이 5세기 중반쯤에 세웠으나 결국 8세기 후반 무렵에 발해에게 합병당한 두막루(달말루)국이다.

부여의 언어와 문화

한민족사에서 이렇게 많은 국가들이 부여 정통론과 계승성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국호인 ‘부여’의 의미도 확실하지 않다. 백제의 ‘소부리’, 신라의 ‘서라벌’ ‘서울’ 처럼 들판(伐·弗·火·夫里)을 뜻한다는 설, ‘불’ 즉 ‘밝음’을 의미한다는 설, 그리고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의 ‘puhu’와 관련이 깊다는 설 등이 있다.

부여는 위만조선의 시대에 건국한 것은 분명하다. 기원 전 128년에 예의 군장인 남려는 28만명을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여라는 국명은 《사기》의 식화열전에 처음 나온다. 또 탁리국의 시녀가 낳은 아이인 ‘동명’이 부여땅으로 이동해서 부여국을 세웠다는 기록들도 있다. 《삼국지》에는 부여인들이 스스로 유이민 집단이라고 말한 사실을 기록했다. 그런데 《위서》 실위전과 《신당서》 유귀전의 기록을 종합하면 북부여의 후예인 두막루와 실위, 거란, 거란계인 고막해는 말이 같다. 그런데 부여와 고구려, 백제는 말이 통하고, 동예는 부여의 별종이므로 언어가 통한다고 했다. 옥저도 《후한서》에 따르면 언어·습속·거처·의복이 고구려와 흡사하다. 그렇다면 부여어는 몽골어계로서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 일대에서 가장 많이 통용된 언어이었고, ‘부여계’ ‘선비계’ ‘거란계’는 일종의 언어공동체였다.

부여의 영토와 자연환경
부여평원의 목초지 풍경.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부여평원의 목초지 풍경.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부여의 역사가 복잡하고 종족과 문화의 성격이 명확하지 않은 이유는, 넓은 만주가 여러 종류의 자연환경들이 구획으로 분리된 복합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동서남북으로 생태계가 다르고, 주민들의 생활양식과 신앙 종교, 국가의 관리방식도 다르다. 하나의 종족이 다른 문화를 발전시키고, 반대로 다른 종족들이지만 유사한 문화를 소유한 경우도 있다. 《삼국지》 등에는 부여가 3세기 무렵에는 만리장성의 북쪽에 있고, 남쪽으로 고구려, 동쪽으로 읍루, 서쪽으로는 선비와 접하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는데, 사방 2000리에 달하는 큰 나라였다고 기록했다. 나는 부여 지역을 여러 차례 답사했고, 대안에서 말을 타고 길림을 거쳐 압록강가의 집안(국내성)까지 내려오면서 지형과 이동 과정 등을 살핀 적이 있었다.

근래에 중심 지역으로 부각되는 길림 지역은 남만주의 산악지대로 들어가는 입구라서 농토가 부족하고, 유물 등에서 확인되듯 강어업이 발달했다. 반면에 눈강과 송화강의 합류 지점은 넓은 송눈평원이 있어 사료의 내용처럼 토지가 넓고 비옥해서 오곡을 생산하는데 적합하고, 목축할 수 있는 초원이 발달해서 소를 잘 사육하고 명마가 나온다는 기록에도 어울린다. 또한 송화강과 눈강 등 긴 강과 큰 호수들로 인하여 어업도 발달했다. 특히 동쪽은 읍루와 물길계가 거주하는 숲지대로 이어져서 질 좋은 목재와 약재, 산삼 등 작물이 산출됐고, 호피, 표피, 웅피, 담비가죽 등을 취급하는 모피산업이 발달했다. 그렇다면 대안(大安)과 농안(農安) 일대가 부여국의 중심지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고구려 때는 부여성이었고, 발해의 부여부가 설치되었다. 그런데 부여는 특이하게 마의하·훈춘·영고탑 등에서 많은 황금을 생산했다. 《위서》에는 장수왕이 북위에 매년 황금 200근(120㎏), 백은 400근(240㎏)을 보냈는데, 다시 두 배로 증가했으며, 주로 부여의 영토에서 생산된 것으로 기록됐다(윤명철, 《고조선 문명권과 해륙활동》).

부여의 멸망과 두막루국

이렇게 풍요로운 환경 탓인지 외부로부터 잦은 공격을 당하던 부여는 고구려에 복속되어 관리를 받다가 494년에는 나라를 들어 항복했다. 망국을 예감하고 떠난 일부 주민들은 두막루국을 세워 부여의 풍습과 성품을 잘 보존했는데, 동쪽 끝이 바다와 닿았고, 사방 2000리였다고 한다. 고구려말인 ‘다물(多勿) 즉 ‘복구토(復舊土)’이라는 의미를 지닌 두막루국도 결국 300여년 만에 같은 계통인 발해에게 합병당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유태용, 《두막루국 흥망사 연구 시론》)

부여인들은 농사를 짓고, 흰색을 숭상해 흰옷을 즐겨 입었던 평화로운 사람들이었다. 반면 가장 먼저 북방 기마문화가 발달했다. 사냥철이 시작되는 음력 12월에 영고(迎鼓)라는 축제를 벌였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등 유목민의 풍습을 유지했다. 이러한 문화와 기술력 등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에 강한 영향을 끼쳤고, 일본열도로 진출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훗날 만주에서 나라를 되찾는 독립군들은 ‘다물단’을 만들었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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