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빛 비단이불' 같은 꽃들의 바다

수십만 평 고원에 펼쳐진 분홍빛 철쭉꽃 융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꽃송이가 바람에 일렁이며 빚어내는 색의 향연은 자연만이 선사할 수 있는 축복이다.

[자연이 주는 色의 향연] ② 황매산 철쭉 군락
◇ 야생 철쭉꽃이 빚어낸 분홍 물결
자연의 큰 선물 중에는 봄의 신록, 가을 단풍, 그리고 갖가지 꽃들이 뿜어내는 강렬한 색이 있다.

황매산 철쭉 군락의 물결치는 분홍 꽃들도 가장 아름다운 색의 향연 중 하나다.

해마다 4월 말, 5월이면 황매산에는 능선과 산록에 수십억, 수백억 송이 철쭉꽃이 피어난다.

하늘 아래 이렇게 많은 꽃이 한꺼번에 필 수 있을까.

경이로울 만큼 꽃들의 바다를 이룬다.

황매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분홍빛 비단 이불이 산을 포근히 덮은 것 같다.

황매산은 높이가 1천108m에 이른다.

높은 산이다 보니 정상 부근의 바람이 여간 세지 않다.

내리쬐는 햇볕 아래 바람 따라 끝없이 출렁이는 수많은 꽃송이에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쉼 없는 삶 가운데서 하늘을 향해 머리를 쳐들고 아우성치는 인간의 얼굴들 말이다.

그만큼 철쭉 군락은 강한 인상을 주었고 그 아름다움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이 압도적이었다.

우리나라에는 3대 철쭉 명산이 있다.

지리산 바래봉, 소백산, 황매산이다.

세 곳의 철쭉 군락이 풍기는 멋은 제각각 다르지만 모두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워 매년 철쭉제가 열린다.

황매산 철쭉 군락지는 행정구역상으로 경상남도 산청군과 합천군에 걸쳐 있을 정도로 넓다.

산청군은 철쭉이 잘 자라게 키 큰 잡목들을 베어주고 있다.

그 때문에 황매산 철쭉 군락은 계속 커지고 있다.

해가 갈수록 철쭉 군락은 장관을 더할 것이다.

[자연이 주는 色의 향연] ② 황매산 철쭉 군락
철쭉 군락의 명성이 퍼지면서 황매산을 찾는 탐방객과 관광객은 증가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세 곳의 철쭉제가 모두 취소됐다.

축제는 열지 않지만, 산청군은 5월 9일부터 황매산 개방을 시작했다.

개방 당일 내렸던 비가 그치자 이튿날인 10일 하루에만 황매산을 찾은 탐방객이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주차장을 이용한 차량은 1천800여대였다.

지난해 축제 기간에는 20여만 명이 방문했다.

취재진이 찾아간 날은 평일이었는데도 탐방객과 관광객이 꽤 있었다.

특히 마지막 봄꽃의 향연이라는 철쭉 군락을 렌즈에 담으려는 사진작가들이 적지 않았다.

기암괴석 중 하나인 탕건바위 벼랑 끝에 위태롭게 앉은 사진작가들이 멀리서도 보였다.

황매산 철쭉 군락지의 이로움 중 하나는 체력이 약하거나 거동이 좀 불편하더라도 방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군락지 코 밑까지 자동차가 올라갈 수 있도록 길이 잘 닦여 있고, 주차장이 여럿 설치돼 있다.

물론 탐방객이 많은 주말에는 주차장이 매우 혼잡스럽다.

군락지 바로 아래에는 황매산미리내파크가 있다.

미리내파크에서부터 군락지까지 무장애나눔길이 조성돼 있다.

장애우들도 군락지를 방문할 수 있게 만든 나눔길은 데크길, 흙콘크리트길, 전망데크 등으로 구성돼 있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풍광이 빼어난 명승지가 높은 산이나 그 주변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등산을 좋아하거나 체력이 튼튼하지 않으면 명승지의 아름다움을 직접 느끼고, 그 기쁨을 누리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근래 전국 곳곳에서 관광 개발이 경쟁적으로 진행되면서 명승지 접근성이 과거와는 차원이 다르게 좋아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몇 가지 사례를 일반화해서는 안 되겠으나 관광 개발의 일차적인 목적이 수익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반갑다.

우리나라의 관광 개발도 이제 '인간의 얼굴'을 갖기 시작했다는 판단이 틀리지 않길 바란다.

해발 1천m 넘는 고산준봉을 누구나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회의 복이 아닐까.

국민 삶의 질이 높아지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물론 관광 개발이 환경을 파괴하거나 자연의 조화를 깨뜨려서는 안 되겠다.

자연 친화적, 인간 친화적이길 기대한다.

미리내파크에서 출발하면 정상까지 대부분의 구간에 나무 데크 길이 조성돼 있다.

황매산은 평평한 고원에 큰 바위산이 우뚝 솟은 모양이어서 정상 가까이 갈수록 경사가 가파르다.

그러나 나무 데크로 계단이 만들어져 있어 오르는 데 큰 위험이 없다.

자신의 체력에 맞는 속도로 참을성 있게 오르기만 하면 된다.

두어살 먹은 아이를 안고 정상까지 올라온 부부가 눈에 띄었다.

[자연이 주는 色의 향연] ② 황매산 철쭉 군락
◇ 태백산맥의 마지막 준봉, 황매산
황매산은 태백산맥의 마지막 준봉이라고 일컬어진다.

태백의 장엄한 기운이 남으로 치달아 마지막으로 큰 흔적을 남긴 곳이 황매산이라는 것이다.

황매산이라는 이름은 정상에 올랐을 때 주변의 풍광이 매화꽃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누런 땅의 색을 한 매화, 즉 황매화의 산이라는 뜻이다.

정상에 서면 매화꽃 속에 떠 있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황매산은 경남 산청군 차황면과 경남 합천군 대병면, 가회면에 걸쳐 있다.

장관을 연출하는 기암괴석으로 인해 영남의 소금강으로 불린다.

정상 부근에 펼쳐진 드넓은 평원은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 촬영지였다.

고인이 된 최진실 씨가 열연했던 '은행나무2-단적비연수'의 촬영 세트도 이곳에 있다.

[자연이 주는 色의 향연] ② 황매산 철쭉 군락
황매산은 지리산 천왕봉과 웅석봉, 필봉산, 왕산 등 인근 명산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상이 아니라 기슭에서도 천왕봉이 크고 선명하게 보이는데, 천왕봉에서도 황매산을 볼 수 있다.

'황매산에서 바라본 천왕봉' '천왕봉에서 바라본 황매산' 사진을 찍어 '이매진'에 나란히 편집하고 싶은 욕심이 굴뚝 같다.

그렇게 하려면 천왕봉에 올라야 한다.

마침 산청에는 천왕봉을 그날 올라갔다가 내려올 수 있는 등산 코스가 있다.

시천면 중산리에서 올라가는 산행길이다.

편도에만 4∼5시간 걸리는 가파른 너덜길이라 아쉽지만 오르기는 다음을 위해 남겨놓기로 했다.

황매산은 지리산, 가야산, 덕유산에 빙 둘러싸여 있지만, 독립적으로 우뚝 솟아 명산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주변에 워낙 이름난 산들이 많아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산청 주변의 교통이 좋아지면서 새로 주목받고 있다.

황매산은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도운 무학대사가 수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무학대사는 자신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산을 오르내리는 어머니가 뱀에 놀라고, 칡넝쿨에 걸리고, 땅가시에 긁혀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100일 기도를 해 세 가지가 서식하지 못하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황매산은 뱀, 칡, 땅가시나무가 없어 '삼무'(三無)의 산으로 불린다.

[자연이 주는 色의 향연] ② 황매산 철쭉 군락
이곳의 또 다른 장관은 다랭이논이다.

인근에 하천이 없는데 논마다 물이 가득하고, 5월 중순도 되지 않았는데 일부에는 이미 모가 심겨 있었다.

잘 다듬어진 수로에는 맑은 물이 콸콸거리며 힘차게 흐르고 있다.

모두 황매산에서 내려오는 물이다.

황매산이 큰 산이다 보니 계곡을 흘러내리는 수량이 풍부하다.

이곳 다랭이논의 특징은 계단식 논을 만들기 위해 쌓은 돌 축대다.

계곡에서 옮겨왔음 직한 커다란 돌로 차곡차곡 축대를 쌓았다.

오랜 세월이 지났을 텐데 얼마나 견고한지 흐트러진 돌이라곤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한뼘의 농토를 일구기 위해 바위만 한 큰 돌들을 옮기느라 선조들이 흘렸을 피땀이 눈물겹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겐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소중한 역사(役事)다.

황매산 계곡과 기슭에 흐르는 맑은 물줄기 주변에는 신촌, 만안, 상법 등 세 개의 마을이 있다.

신촌마을은 형성 연대가 조선 초, 1440년대까지 올라간다.

산골 다랭이논이지만 물이 풍부하고 논 사이사이에 길이 잘 닦여 있어 농사가 꽤 될 것 같다.

이곳에서는 '메뚜기 쌀'이 재배된다.

농약을 치지 않아 메뚜기가 사는 논에서 자란 쌀이라는 뜻이다.

◇ '당일 코스'로 다가온 천왕봉 산행
백두산에서 힘차게 뻗어내린 백두대간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그 위용을 마무리한다.

천왕봉은 주변에 높고 수려한 명산을 거느리는데 산청은 그 산들에 둘러싸여 있다.

지리산은 경남 산청군, 하동군, 함양군, 전남 구례군, 전북 남원시 등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 있어 정상인 천왕봉에 오르는 등산길이 다양하다.

이 중 산청군 중산리에서 출발하는 코스가 가장 짧은데 요즘 지리산 애호가들에게 주목받고 있다.

대전-통영 고속도로가 뚫린 뒤 산청은 자동차로 서울에서 3시간, 부산·광주에서 2시간, 대전·대구에서 1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거리가 됐다.

어디서든 새벽 일찍 출발해 산청을 통하면 천왕봉에 오른 뒤 당일 귀가할 수 있게 됐다.

도시인들이 좀체 엄두를 내기 어려운 천왕봉 등산이 당일 코스가 된 것이다.

산청은 산, 물, 인심이 맑아 '삼청'(三淸)이라고 일컬어진다.

지리산 청정지역으로 이름나 개발 관련 규제가 까다롭다 보니 이렇다 할 산업이 형성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산천은 깨끗하고 아름다워 볼거리가 적지 않다.

기암절벽에 자리 잡은 정취암은 신라 때 창건된 고찰이다.

정취암 바위 끝에서 하계를 내려다보는 조망은 시원함과 적막감으로 속세를 벗어난 느낌을 준다.

[자연이 주는 色의 향연] ② 황매산 철쭉 군락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를 내려 온 국민의 불심을 일깨웠던 성철 스님 생가터에는 사찰인 겁외사가 건립됐고, 생가가 복원돼 있다.

인근 경호강을 따라 성철 스님 순례길이 조성돼 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면화를 재배했던 목면시배유지에는 문익점 선생 기념관이 만들어져 있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엄동설한에 걸칠 것이라곤 삼베, 칡으로 짠 갈포밖에 없어 얼어 죽는 민초가 많았다.

삼베는 여름에 시원하지만, 기온이 떨어지면 옷감이 바스러지고, 보온성이 없다.

선생은 고려 말 중국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들여왔고, 목화를 개량해 전국적으로 이를 보급했다.

덕분에 우리 의복사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600년 전 선조의 은혜가 따사롭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