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중심으로 5·18 재구성한 책 '그들의 5·18―정치군인들은 어떻게 움직였나'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0주년이 됐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뀔 만큼 긴 시간이 흘렀지만 5·18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특별법 제정, 국회 청문회, 진상규명위원회 활동 등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40주년을 맞아 관련서들이 잇따라 발간되고 있다.

그중 노영기 씨가 펴낸 신간 '그들의 5·18―군인들은 어떻게 움직였나'는 기존의 5·18에 대한 접근이 주로 항쟁 주역들을 중심으로 한 것과 달리 군 중심으로 5·18을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2007년까지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했던 저자는 보안사령부 자료를 비롯한 방대한 군 자료를 비판적 시각으로 분석한다.

노씨는 5·18의 역사적 맥락을 인과관계에 따라 추적해간다.

우선 군의 정치적 동원(계엄령과 위수령, 긴급조치 등), 공수부대의 시위 진압 투입, 정치하는 군인(신군부) 등이 박정희 정권이 남긴 유산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1979년 10·26 이후, 12·12 군사반란으로 군 지휘권을 장악한 신군부가 무엇을 지향했는지 살핀다.

더불어 보안사령부의 부마항쟁 평가와 육군본부의 보고서에 1980년 공수부대의 폭력이 배태돼 있었으며, 군의 강경 진압을 부추기는 이 같은 지침이 1980년 5월 광주에서 공수부대에 의해 더욱 잔혹하게 적용됐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왜 군인들은 국민에게 총을 쏘았을까
신군부는 진작부터 시위 진압용 '충정훈련'을 강화했다.

1980년 5월 15일 대학생 시위대의 '서울역 회군' 등 군 투입의 명분이 희석되는 와중에도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등 정치군인들의 '야욕'을 보란 듯 진행해나간다.

5월 18일 오후 4시경부터 광주 시내에 공격형 특수부대인 공수부대의 투입이 결정됐다.

경찰 병력으로 당시 시내 상황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음에도 그랬다.

저자는 공수부대의 시위진압 양상이 어떠했는지 군과 민간 자료로 재구성한다.

진압과정에서 나타난 공수부대원들의 폭력과 야만, 김대중 연행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중첩돼 19일부터 학생 시위가 시민항쟁으로 전환돼 커져갔다.

그날 군의 최초 발포가 있었으나 정식 명령계통에 따른 보고가 이뤄지지 않았고, 보고된 부대에서도 적절한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저자는 당시 상황을 볼 때 북한군 침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그해 5월에 '남북 총리회담을 위한 실무회담'이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미연합사와 육군본부도 '북괴 남침설'이 근거 없다고 판단했다.

신군부가 주장했던 북괴 남침설은 '북풍(北風)'이자 국민 기만행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시민들의 저항은 5월 20일 오후 차량시위를 계기로 더욱 강해진다.

이날 밤 광주역 부근에서 공수부대의 집단발포와 광주역에서 전남대로의 철수가 있었고, 이튿날엔 집단발포로 많은 시민이 죽거나 다쳤다.

상무충정작전이 단순 무력 진압이 아닌 '국민들을 상대로 한 전투'였음은 탱크 18대와 무장헬기 등 작전 부대의 장비와 군인들의 의식, 작전 활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노씨는 말한다.

무엇보다 열흘간 광주에서 '작전'을 편 군부대가 51만여 발의 총탄을 소모했다는 군 자료가 이를 입증한다는 얘기다.

저자는 당시 지휘권 이원화도 언급한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이후 계엄사령부는 실무적 역할에 그친 반면에 정치적 사항은 보안사령부가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 전교사 사령관 교체와 24일 두 건의 오인사격이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책은 그간 발굴되지 않았던 자료들로 많은 사실을 밝혀낸다.

안종훈 장군이 5월 17일 전국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군의 정치적 동원에 반대한 사실, 박춘식 장군이 무력 진압에 반대한 사실 등이 그렇다.

노씨는 "5·18은 사람들이 만든 '사회적 재난'이며 '재앙'이었다.

그 중심에는 공수부대로 대표되는 군대, 국가의 공권력이 있었다"며 "15년 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 참여해 많은 자료를 보고 사람들을 만났다.

그 자료의 한쪽 한쪽을 넘기는 동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고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고 회고한다.

"40년이 지났음에도 5·18은 아직 풀리지 못한 의문들이 남아 있다.

이는 무엇보다 자료의 조작과 은폐에서 기인한다.

40년 전 5월 18일 이후 군에서는 수많은 명령이 오간 명령서와 그 행위를 증명하는 자료가 남아 있다.

하지만 있어야 할 자료 중 상당수가 사라지고 조작됐다.

5·18 이후 정부와 군이 진상규명에 대응하는 논리를 만들거나 자료를 없앤 것으로 추정된다.

"
푸른역사. 484쪽. 2만5천원.
왜 군인들은 국민에게 총을 쏘았을까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