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기획전 ‘판화, 판화, 판화’에 전시 중인 강행복의 2019년작 ‘화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기획전 ‘판화, 판화, 판화’에 전시 중인 강행복의 2019년작 ‘화엄’.
손바닥만 한 크기의 매끈한 타원형 돌멩이에 ‘짱돌’이라는 은색 글자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글자와 무늬, 그림 따위의 모양을 파낸 뒤 그 자리에 물감을 넣어 그림을 찍어내는 스텐실 기법으로 만든 작품이다. 윤동천 화백은 여기에 ‘분노’라는 제목을 붙였다. 긴 말, 복잡한 표현이 필요치 않다. 1970~1980년대를 겪어본 사람이면 바로 ‘필(feel)’이 오니까.
설치·조각·디지털 아트로…확장하는 판화의 세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판화, 판화, 판화’는 다양한 형식으로 확장하고 있는 판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자리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판화는 다양한 판법의 발달과 함께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매체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미디어아트와 융복합 예술 등 새로운 흐름 속에서 입지가 좁아졌다. 국립현대미술관이 13년 만에 마련한 대규모 판화전인 이번 전시는 한국 현대판화를 대표하는 작가 60여 명의 판화, 아티스트북, 드로잉, 설치, 조각 등 100여 점을 통해 판화가 현대미술로서 어떻게 새롭게 입지를 굳히고 확장하는지 보여준다.

생각해보면 판화만큼 우리 일상과 밀접한 회화 장르도 많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책이다. 예부터 책의 표지를 장식하는 주역은 판화였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동식물, 자연 등을 표현한 류연복의 전각판화, 남궁산의 장서표판화, 꽃과 나비 등을 새긴 김란희의 ‘안녕? 꽃님아’ 시리즈 10점 등이 먼저 눈길을 끈다.
원로 목판화가 김상구의 'No. 895(파란새)', 2005, 30x180cm
원로 목판화가 김상구의 'No. 895(파란새)', 2005, 30x180cm
한국 추상목판화를 대표하는 원로 작가 김상구의 ‘No.895(파란새)’와 ‘No.820(산죽)’은 가로로 길게 제작한 판화 작품이자 판화 아티스트북이다. 국내와 해외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강행복의 2019년 작 ‘화엄’은 꽃과 나무, 구름, 길 등 주변 풍경을 목판화로 찍어낸 뒤 바느질로 하나의 책으로 묶은 작품이다.

투명 아크릴 상자 안에 책의 형상을 넣고 LED(발광다이오드) 조명을 밝힌 42권의 책으로 6단의 책장을 장식한 강애란의 ‘디지털북 프로젝트’는 판화에서 설치로 나아간 작품. 문승근의 ‘활자구’는 지름 9.5㎝의 구(球) 표면에 납활자를 빼곡히 붙인 작품인데, 잉크를 바른 공을 종이에 굴리면 글자가 그대로 묻어나 또 하나의 작품이 된다.
설치·조각·디지털 아트로…확장하는 판화의 세계
제2부 ‘거리’에서는 1980년대의 민중목판화를 비롯해 현실의 사회 이슈를 적극적으로 담아낸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머리에 뿔이 달린 도깨비들이 술판을 벌이는 모습을 담은 오윤의 1985년 작 ‘도깨비’를 비롯해 홍선웅의 ‘제주 4·3 진혼가’, 홍성담의 ‘5·18 연작’ 등 익숙한 민중판화, 일상에 지친 도시 서민의 삶을 보여주는 나윤의 ‘지하철’ 연작 등이 시선을 끈다.

판화는 작가에게 예술적 창의성과 기술적 숙련도를 동시에 요구한다. 이 때문에 석판화, 동판화, 목판화, 실크스크린, 메조틴트, 세리그라프, 스크린프린트, 리놀륨판화 등 판법에 따라 동원되는 기술도 다양하다. 50년 이상 동판화 작업을 꾸준히 해온 이영애의 애쿼틴트 작업 ‘내 날개 아래 바람 1’은 애쿼틴트를 능숙하게 사용해 세필로 그린 듯 섬세한 묘사가 감탄사를 자아낸다. 동판화의 일종인 애쿼틴트는 동판을 부식시켜 요철을 만드는 에칭 기법의 하나다.
임영길의 '기호풍경-신의주', 2017, 53.5x76.5cm
임영길의 '기호풍경-신의주', 2017, 53.5x76.5cm
임영길의 ‘기호풍경-신의주’는 백두산 삼지연, 풍계리, 서울, 인천, 제주 등 전국 16개 지역을 기호나 상징으로 재현한 작품 중 하나다. 적게는 10판에서 많게는 19판까지 많은 색을 입혀 찍어낸 다색 실크스크린 판화로, 회화인지 판화인지 갸우뚱하게 한다.

시간의 개념을 판화의 느린 호흡으로 담아낸 강동주의 ‘커튼’, 판화로 복제한 인물들을 오려내 바닥에 세운 김영훈의 ‘무엇이 진실인가’, 투명한 아크릴판에 판화기법의 하나인 수전사와 스캐노그라피를 사용해 만든 김인영의 ‘매끄러운 막’(2019)은 판화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준다. 전시는 8월 16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