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개막한 국립중앙박물관 테마전 ‘조선, 역병에 맞서다’에서 한 관람객이 마마 자국이 남아 있는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들의 초상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11일 개막한 국립중앙박물관 테마전 ‘조선, 역병에 맞서다’에서 한 관람객이 마마 자국이 남아 있는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들의 초상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예조·이조 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한 조선 중기의 문신 정경세(1563~1633)의 맏아들은 영민했다. 1624년 8월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급제하고 9월에는 대과에도 연이어 급제한 수재였다. 그러나 이듬해 3월 춘추관에서 숙직을 하다 두창(痘瘡·천연두)에 걸려 죽고 말았다. 불과 29세 때였다. 장남을 잃은 정경세는 손수 제문을 지어 이렇게 애도했다.

‘처음 네가 검열(檢閱)에 임명되었을 때 두창이 한양에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네가 병들었다고 아뢰고 올라오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마음대로 편한대로 한다는 것이 분수와 의리 면에서 바르지 못한 것 같았다. (중략) 나는 너를 잃고 난 이후 인간세상에 아무런 미련이 없구나.’

11일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 1층 중근세관 조선2실에서 시작된 테마전 ‘조선, 역병에 맞서다’에 전시된 내용이다. 이번 전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대혼란을 겪는 가운데 조선시대 사람들이 전염병의 공포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보여준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전염병이었던 두창의 실상과 역병을 극복하기 위한 의서(醫書) 편찬 등의 노력, 전염병의 공포를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려 했던 백성들의 분투 등을 짐작하게 한다.

영조시대 심익운(1734~?)은 두창의 큰 희생자였다. 동생 용득이 여덟 살 때 두창으로 죽은 후 불과 7년 사이에 딸과 누이, 동생의 부인과 자신의 아내, 아버지를 모두 두창으로 잃었다. 그가 어린 동생을 기리며 쓴 묘지명에는 잇달아 가족을 잃은 그의 참담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반면 영조 때 노론의 대표 학자 이재(1680~1747)는 두창에 걸린 두 손자를 치료해준 의원에게 감사하는 시를 남겼다.

그만큼 두창은 누구도 피하기 힘든 역병이었다. 영조 때인 1774년 제작된 ‘등준시무과도상첩’에 수록된 김상옥, 전광훈, 유진하의 초상화에서는 두창 흉터가 확인된다. 수록된 18인 중 세 명에게 흉터가 있을 만큼 조선시대에 두창이 만연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역병을 이겨낸 희망의 메시지도 전한다.

17세기 초 온역(溫疫·티푸스성 감염병), 18세기 홍역 등 새로운 감염병 출현에 대응한 조정의 노력도 조명한다. 1613년 광해군의 명으로 허준이 편찬한 ‘신찬벽온방’(보물 1087호·허준박물관 소장)은 1612~1623년 조선 전역을 휩쓴 온역에 대처한 지침서였다. 명의 허준이 말하는 ‘전염되지 않는 법(不傳染法)’이 눈길을 끈다. ‘우선 문을 열어두고 큰 솥에 물 두 말을 채워 집 한가운데 두고 소합향원 20환을 넣고 달인다. 향기가 역기(疫氣)를 흩어버릴 수 있다’ ‘환자를 상대하여 앉거나 설 때 반드시 등지도록 한다.’

조선시대 내내 두창은 호구마마, 호구별성 등 무속의 신으로 받들어졌다. 조정에서도 역병이 돌면 돌림병으로 죽은 사람의 귀신인 여귀(鬼)의 혼을 달래는 여제(祭)를 지냈고, 지방 관아에도 사직단, 문묘와 함께 반드시 여제단을 설치했다. 여제단을 표시한 지도, 괴질이 돌 때 큰 역할을 한다고 여긴 ‘대신마누라도’, 아픈 사람을 구해준다는 석조약사불 등을 만날 수 있다.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