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소장품’전에 전시된 김주현의 설치작품 ‘생명의 다리-9개의 기둥’(왼쪽)과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상설전에 걸린 오지호의 ‘남향집’.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소장품’전에 전시된 김주현의 설치작품 ‘생명의 다리-9개의 기둥’(왼쪽)과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상설전에 걸린 오지호의 ‘남향집’.
마루에 도마를 편 아낙네가 무를 썬다. 마루에 걸터앉은 아낙네는 칼로 무 껍질을 벗기고, 양동이를 들고 무언가를 나르는 여인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뒤로 돌아 젖을 물리고 있는 젊은 여인, 아기를 업은 소녀도 있다. 고개를 외로 꼰 채 멍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소년은 무료함에 지친 표정이다.

1936년 제15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특선을 차지한 철마(鐵馬) 김중현(1901~1953)의 ‘춘양(春陽)’이다. 서양화를 주로 그렸던 철마가 처음 동양화를 출품하고 상까지 받아 화제가 됐다고 한다. 네 폭의 병풍 형식 그림 속에 당시 여인들의 삶이 담겨 있다. 등장인물은 모두 무표정인데 노랑, 파랑, 옥색, 흰색 등 한복의 색채가 밝은 분위기를 형성한다.

국립현대미술관(MMCA)이 지난 6일부터 서울관에서 열고 있는 ‘MMCA 소장품 하이라이트 2020+’는 2013년 개관 이후 처음 마련한 소장품 상설전이다. 8500여 점의 소장품 가운데 김중현의 ‘춘양’을 비롯한 20세기 한국 미술 대표작 54점을 선보이고 있다. 시기와 특성별로 ‘개항에서 해방까지’ ‘정체성의 모색’ ‘세계와 함께’ ‘다원화와 글로벌리즘’ 등 4부로 구성했다. 근현대 미술이 태동한 해방 전부터 1950년대 이후 앵포르멜 회화, 조각, 단색화, 실험미술, 민중미술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춘양' '생명의 다리'…다시 문 연 미술관들의 '소장품 향연'
우선 MMCA 소장품 가운데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세 점이 눈에 띈다. 국내 서양화 작품 중 가장 시기가 이른 고희동의 1915년작 ‘자화상’, 한국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오지호의 1939년작 ‘남향집’, 김환기의 1938년작 ‘론도’ 등이다. ‘남향집’은 오지호가 고향 개성에서 미술교사를 하며 살았던 집을 배경으로 그린 작품으로, 화면 가운데 큰 나무를 과감하게 배치한 사진 같은 구도와 나무의 그림자를 푸른색으로 처리하는 등 인상주의 화풍을 강하게 보여준다.

운보 김기창이 마음에 두었던 소녀와 자신의 막내 누이를 그린 1934년작 ‘정청(靜聽)’, 선전에서 다섯 차례나 특선을 차지했으나 29세에 요절한 김종태(1906~1935)가 1929년에 그린 ‘노란저고리’도 주목된다. 박수근의 1960년작 ‘할아버지와 손자’는 화강암의 질감을 살린 작가의 특징이 정점에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박미화 학예연구관은 “MMCA가 1971년에 100만원을 주고 소장한 작품인데 지금은 100억원에 육박한다”고 설명했다. 장욱진의 ‘까치’(1958년), 이중섭의 ‘세사람’과 ‘투계’ ‘부부’도 걸렸다.

한국 모더니즘과 추상화의 선구자 유영국(1916~2002)의 1957년작 ‘작품’과 1968년작 ‘작품(산)’은 지난 7일 전시회를 깜짝 방문한 그룹 방탄소년단 리더 RM이 한참 동안 감상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60년대 앵포르멜의 영향이 남아 있는 오종욱의 ‘미망인 No.2’, 이건용 곽인식 백남준 등의 실험미술, 김창열 이우환 박서보 윤형근 등의 단색화, 임옥상 신학철 등의 민중미술 작품도 소개한다. 세계를 무대로 활발히 활동 중인 서도호의 ‘바닥’, 이불의 ‘사이보그 W5’ 등 설치작품도 주목된다. 서도호의 ‘바닥’은 2001년 베니스 비엔날레 본관에 설치했던 작품으로, 수십만 개의 인물상이 떠받치고 있는 정방형 유리판 40개를 방 하나에 가득 메워 사람들이 그 위를 지나가도록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임시 휴관했던 서울시립미술관(SeMA)도 6일 재개장과 함께 그동안 온라인으로만 소개했던 ‘모두의 소장품’ 특별전을 서소문 본관에서 열고 있다. SeMA가 1985년부터 수집한 5173점의 소장품 가운데 엄선한 86점과 미술관 소장작가의 미소장품 45점을 더해 작가 49명의 작품 131점을 소개하고 있다.

전시는 실험적인 작품 위주다. 2인 이상 작가들의 협업작품을 컬렉티브 랩, 소장품의 24%를 차지하는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레퍼런스 룸, 영상을 비롯한 뉴미디어 작품을 소개하는 미디어 시어터,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 중심의 그린 라이브러리, 다양한 모양의 도형과 스위치, 전구로 설치한 크릴스털 갤러리, 퍼포먼스 스테이지 등 여섯 개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김주현의 ‘생명의 다리-9개의 기둥’은 한강에 나무다리를 놓아 사람과 동물이 서울의 남북을 오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은 작품. 1971개의 아프젤리아 나무막대를 그물망처럼 정교하게 엮고, 나무 막대 사이에는 다양한 식물이 자라는 화분을 넣었다. 천경자 화백의 기증작품을 볼 수 있도록 별도의 방을 마련한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도 꼭 챙겨봐야 할 곳이다.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