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아이거 월트디즈니컴퍼니 회장이 2016년 6월 중국 상하이 디즈니랜드 개장 당시 기자들에게 브리핑하는 모습.  /한경DB
로버트 아이거 월트디즈니컴퍼니 회장이 2016년 6월 중국 상하이 디즈니랜드 개장 당시 기자들에게 브리핑하는 모습. /한경DB
‘21세기 디즈니 제국의 황제.’ 로버트 아이거 월트디즈니컴퍼니 회장(사진)에게 달리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디즈니는 아이거 체제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이전의 디즈니는 미키마우스와 백설공주, 인어공주 등 과거의 영광에만 기댄 채 기울어져 가는 ‘꿈의 동산’이었다. 이후의 디즈니는 동산이 아니라 우주의 은하계로 거듭났다. ‘겨울왕국’의 엘사가 만든 마법의 얼음궁전, “와칸다 포에버”를 외치는 흑인 슈퍼히어로 블랙 팬서, 우주를 누비는 슈퍼헤로인 캡틴 마블, 스타워즈의 제다이 등 수많은 캐릭터가 디즈니 은하계의 별들이다.

디즈니의 이 같은 변신은 아이거의 적극적인 인수합병(M&A) 전략이 없었다면 결코 이뤄낼 수 없었다. 아이거는 2006년 픽사, 2009년 마블엔터테인먼트, 2012년 루카스필름을 인수했다. 지난해엔 21세기폭스의 영화·TV 부문도 디즈니의 지붕 밑으로 끌어왔다. 하나같이 글로벌 미디어업계에서 ‘세기의 인수’라고 불린 M&A다.

[책마을] 픽사·마블 인수 이끌어낸 그의 한마디…"절대 디즈니화 않겠다"
《디즈니만이 하는 것》은 아이거가 이 과정에서 겪었던 다양한 일들을 직접 풀어쓴 책이다. 이 책은 자서전이 아니다. 아이거는 철저히 ‘디즈니에서 40여 년간 일해온 아이거’란 자아에 초점을 맞춘다. 고향과 부모, 학창시절 얘기는 전체 책 분량의 10% 남짓이다. 뉴욕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고, 피자 굽는 아르바이트하던 대학생이었고, ABC TV 스튜디오의 말단 보조로 입사했다는 게 전부다. 대신 지금의 자신이 있기까지 거친 수많은 결정의 순간, 평생의 은인들, 훌륭한 사업 파트너들을 비중 있게 다룬다. 그는 ABC 사장, ABC가 디즈니에 인수된 후 ABC그룹 회장, 마이클 아이즈너의 후임으로 디즈니 최고경영자(CEO) 겸 회장이 된 과정을 단 한마디로 요약한다. “난 언제나 팔려 다녔다.”

아이거는 스티브 잡스, 아이크 펄머터, 조지 루카스 등 이름만 대면 금방 알 수 있는 쟁쟁한 인물들을 상대로 각각 픽사, 마블, 루카스필름의 인수를 추진한다. 그는 이들로부터 “OK”를 이끌어내기 위해 철저한 정공법을 구사한다. 디즈니가 왜 해당 기업을 원하는지, 거래 조건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밝힌다. 꼼수를 쓰는 대신 계약 상대방과 인간 대 인간으로 대화한다.

가장 큰 조건은 ‘디즈니화’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조직의 개성을 철저히 지켜줘야 큰 성과를 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인수 대상 기업의 임직원들을 안심시킬 수 있었다. 아이거는 인수 성공의 핵심 이유를 이렇게 정리한다. “잡스는 픽사의 본질을 존중하겠다는 내 약속을 신뢰해야 했다. 펄머터는 마블 팀이 가치를 인정받고 새로운 조직 안에서 발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자 했다. 루카스에게는 자신의 유산이, 자신의 ‘어린 자식’이 디즈니에서 제대로 보살핌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잡스와 나눈 우정도 비중 있게 다룬다. 잡스는 아이거가 어려운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 항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디즈니와 픽사의 합병 발표 30분 전, 잡스는 아이거에게 췌장암 재발과 시한부 선고 사실을 밝힌다. 아이거는 당황했지만 “비밀을 지켜 달라”는 잡스의 부탁을 끝까지 지킨다. 두 사람은 “하나의 플랫폼을 통해 영화와 TV 프로그램, 스포츠 중계, 뉴스 등을 배급하고 싶다”는 아이디어도 공유했다. 아이거는 “만약 잡스가 여전히 살아 있었더라면 우리는 회사(디즈니와 애플)를 합쳤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 가능성을 진지하게 논의했을 것이다”고 고백한다.

아이거가 디즈니 경영의 성공으로 꼽은 키워드는 진심과 고결함, 혁신이다. 누구를 만나든 정중하게 대하고, 리더로서의 고결한 가치를 조직원들과 공유하고, 혁신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마음가짐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과 창출을 강조하되 부하 직원들을 극한으로 밀어붙이진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현역으로 활동 중인 세계적 경영인의 ‘펄떡이는 생선 같은 이야기’다. 그 거물의 성공 비결이 단순하지만 지키기는 어려운 ‘인간으로서의 원칙’임을 깨닫게 한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