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중세 필경사 손끝으로 빚어낸 '한 권의 예술'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서양 최초로 금속활판 인쇄술을 발명하기 전, 중세 유럽에서 책은 금단의 열매였다. 아무나 가질 수 없기에 갖고 싶고, 함부로 볼 수 없기에 보고 싶고, 다가갈 수 없기에 다가가고 싶은 존재였다. 책은 손에서 손으로만 전승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책을 베껴 쓰는 필경사는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기록을 소중히 여겼다. 필경사들은 최고의 채색 기술을 동원해 책을 성스럽고도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책마을] 중세 필경사 손끝으로 빚어낸 '한 권의 예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은 세계적인 미술품 경매기업 소더비에서 25년 동안 중세 채색 필사본의 경매를 담당해 온 크리스토퍼 드 하멜이 중세부터 현재까지 명성을 떨치는 필사본 12권을 소개한 책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출신 고문서학자인 저자는 그동안 1000년 넘게 전문가 사이에서 은밀하게 추앙돼 온 필사본의 도록을 과감히 일반 독자들에게 열어젖힌다. 이 책에 수록된 200장의 컬러 도판도 직접 촬영했다.

책은 중세를 상징하는 대표 키워드인 기독교를 비롯해 당대의 시와 소설, 미술, 병법 등을 소개한다. 1장에 등장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복음서’는 597년 로마 교황이 잉글랜드로 선교단을 파견했을 때 제작된 책이다. 원본은 가톨릭과 영국 성공회에서 성물(聖物)로 경배된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2010년 영국을 방문했을 때 당시 성공회의 수장이었던 로완 윌리엄스 캔터베리 대주교와 함께 이 복음서에 키스하는 의식을 치렀다.

아일랜드의 국보로 꼽히는 ‘켈스의 서’는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 문화유산이다. 이 책은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아일랜드 트리니티대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매년 50만여 명의 사람이 ‘켈스의 서’를 보러 온다. 일반인들은 유리창 너머로만 볼 수 있다. 저자는 “전시실로 들어가기 위해 포장된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관광객들의 줄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며 “켈스의 서를 구경한다는 건 중세의 순례 성지를 돌아보는 것처럼 진지한 일이었다”고 기쁨에 넘쳐 묘사한다.

‘성 히에로니무스의 이사야 주석서’는 책 자체의 예술적 가치도 높지만, 필사본을 만든 필경사가 자신의 자화상과 서명을 남겼다는 사실로 더욱 유명하다. 필경사들이 주로 수도원의 수도사였고, 기록의 전승이 비밀스럽게 진행됐던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저자는 옥스퍼드대에 보관된 이 책에 대해 마치 추리소설을 쓰듯 설명한다.

‘잔 드 나바르 기도서’는 중세 왕족의 기도서가 얼마나 귀중하게 다뤄졌는지 보여준다. 귀하기에 책의 ‘팔자’는 좀 사나웠다. 이 기도서는 프랑스 루이 9세의 무남독녀인 잔 여왕이 즐겨 봤고 왕실 여성들에게 대대로 전해졌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이 책을 약탈했다. 프랑스군이 가까스로 되찾은 이 책은 1919년 소더비 경매에 나와 당시 세계 최고가에 판매됐다.

‘코덱스 아미아티누스’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라틴어 성서다.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계층이 수도사와 귀족밖에 없었던 시절, 성서 공부의 벽이 얼마나 높았는지 상징한다. ‘레이던 아라테아’는 천문학에 대해 논한 필사본이다. 중세 독일의 시와 노래를 모은 ‘카르미나 부라나’, 밀라노 귀족인 비스콘티 공작에게 바쳐진 ‘비스콘티 세미데우스’는 중세의 군사철학과 용병술을 살필 수 있는 병법서다.

저자는 필사본 원본만이 갖고 있는 아우라를 이 책을 통해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한계를 안타까워한다. 중세 필사본의 실제 무게감과 울퉁불퉁한 결, 냄새, 책이 품은 세월의 흔적 등을 직접 봤을 때의 희열을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중세 필사본의 매력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자신의 속마음을 책에 매력적으로 표현한다. 독자들에게 “나와 함께 이 아름다운 책에 매혹당해 보라”고 손짓한다.

‘중세’ 하면 떠오르는 칙칙한 무채색이 얼마나 작은 단편에 불과한지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화려한 세밀화와 각양각색의 필체로 무장된 필사본의 사진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700쪽이 넘는 책 두께의 압박을 내려놓고 한 장씩 넘기다 보면, 쉬운 문체로 중세의 예술과 신앙을 설명하는 저자의 겸손과 친절을 만날 수 있다.

번역도 훌륭하다. 한국브리태니커 편집국장을 지낸 번역가 이종인 씨가 원문의 어려운 단어들을 매끄럽게 풀어냈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