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세르히 플로히가 쓴 신간 '얄타'
"얄타서 만난 미·소 정상 30분만에 극동 미래 결정"
유럽 남동쪽 내해(內海) 흑해에 면한 휴양지 얄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5년 2월 3일 크림반도 남쪽 도시 얄타에 세 사람이 모였다.

회담 참가자는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소련 공산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 당시 추축국 이탈리아는 항복했고, 독일에도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운 상태였다.

승전을 앞둔 미국, 영국, 소련 정상이 진행한 얄타회담은 8일 동안 이어졌다.

그들은 독일이 패전하면 프랑스를 합쳐 4개국이 분할 점령하고, 폴란드에서는 선거할 때까지 임시정부를 두기로 합의했다.

유럽 국경선, 전쟁 배상금, 전쟁 포로, 소련의 대일전 참전 등도 논의했다.

소련 출신 역사학자 세르히 플로히 미국 하버드대 석좌교수는 신간 '얄타 - 8일간의 외교 전쟁'에서 루스벨트를 주인공으로 삼아 회담 과정을 세밀하게 복원한다.

그는 다양한 기록을 검토해 회담을 재구성하고, 공백은 상상력을 동원해 메웠다.

얄타회담 내용은 익히 알려진 만큼, 한국 독자의 관심은 회담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에 쏠릴 수밖에 없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38선을 경계로 한 한반도 분단은 얄타회담에서 논의되지 않았다"며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이야기했지만, 일제 치하 한반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정확히 의견을 모으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즉 얄타회담에서 한국 문제가 협상 테이블 위에 올랐지만, 명확한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한국이 특정 국가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을 뿐, 큰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신탁 통치 기간과 영국을 통치국에 넣을지에 대해서만 간단히 대화를 나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현대사에서 얄타회담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는 않다.

저자는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에서 군사작전을 펼치게 되는 1945년 8월까지 두 나라의 이익을 균형 잡게 할 어떠한 외교적 결정도 내려지지 않았고, 그 결과 (일본 패전 이후) 한반도를 절반으로 나누는 임시적 해결 방법이 수행됐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단 30분 만에 극동의 미래를 결정했다"고 강조한다.

특히 스탈린은 참전 대가로 일본이 장악한 영토와 중국을 희생시키는 전략적 양보를 얻어냈다고 평가한다.

얄타회담을 보는 저자 시각은 꽤 비판적이다.

그는 회담 참가자들이 과거부터 이어져 온 강대국의 권력 게임을 계속해 나갔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준비를 아무리 잘해도 똑같은 가치를 공유하지 않은 사람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에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서 "이 대가를 줄이려면 적을 아는 것 못지않게 자신의 우방도 잘 알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번역은 우크라이나 주재 대사를 지낸 허승철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가 했다.

그는 후기에서 "이 책은 그간 나온 얄타회담 저술 중 학술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며 "문화와 사상적 배경이 다른 상대와 협상을 이끌어가는 일이 절대 쉽지 않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역사비평사. 756쪽. 4만5천원.
"얄타서 만난 미·소 정상 30분만에 극동 미래 결정"


/연합뉴스